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하 Jan 04. 2024

소멸되어 가는 나에게, Cheer up!

마음속으로 많은 응원 해주세요.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앞둔 어느 날, 말로만 듣던 ‘묻지 마 조직개편’이 진행됐다. 우리 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단 무능력 팀장 아래를 벗어나서 기뻤지만, 아랫 직원들 모두가 입을 모아 ‘빡세다’고 표현한 부장님이 나의 상사가 되었다. 한 편으로는 기대를, 한 편으로는 걱정을 하며 새로운 24년을 맞이했다.


새해부터 불나게 달려보자는 부장님의 말씀에 환한 미소로 맞이했지만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한 공유 문서를 받아보니 아직 일은 시작도 안 했는데 아득하다. 조직의 항해사가 바뀌었으니 나침반을 새롭게 조정하는 것은 당연, 기존에 겨우겨우 위태롭게 쌓아가던 모래성은 부수고 다시 탄탄한 뼈대를 만들라 명하신다.


열정 넘치던 입사 직후에는 나 역시 새로운 뼈대를 세우고 싶었다. 입사한 지 어느덧 반년, 예상했던 것보다 위축된 회사 환경에 어느새 적응되어 버렸고 스타트업에서 도전적으로 덤비던 모습은 사라졌다. 특별히 싸워야 될 일은 만들어서도 안되고, 싸우는 순간 적으로 몰리는 이런 환경 속에 너무 깊게 젖어들었다.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은 하나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극심한 감기까지 찾아왔다. 겨우겨우 보고를 마치고 집에 가려고 하면 정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내 일은 없고 누군가를 위해 계속해서 같은 문서를 찍어내는 복사기가 된 기분이 든다. 이러려고 호기롭게 이직한 건 아닌데, 근사했던 대기업의 시작은 작은 부품이 전락되어가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는 건 없는 것 같고, 자신은 없어진다. 데이터를 맹신하지 말자고 그토록 외쳤는데, 아무런 데이터를 볼 수 없는 현재 환경은 나를 더 위축되게 만든다. 데이터가 없는 설득논리는 약해지고 점점 그저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줏대 없는 인간이 되는 기분이 든다.


한 때는 문제를 발견하면 해결할게 생겨서 신이 났다. 그러나 나의 발의로 인해 수면 위로 올라온 문제는 고스란히 나의 문제가 됐고, 그 문제 때문에 일을 못한다는 타 팀의 목소리를 듣는 타깃이 됐다. 함께 해결하자 의기투합을 하기보다는 책임을 탓하고, 고치지 않으면 액션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설령 내가 만든 문제가 아니라도 우리 프로덕트의 문제라면 내 문제라고 생각하고 일했는데, 그렇게 일하니 정말 내 문제가 되더라. 시간이 흐르고 보니 프로덕트는 나 때문에 망가진 게 되어있다. 어쩌다가, 내가 사랑한 이 프로덕트는 잘못된 주인을 만나 성장하지 못하는 문제아가 된 것인가. 어디부터 잘못됐을까.


가야 할 길은 멀고,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자신은 없어지고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휘둘리고 먼지같이 흩날리다 곧 소멸될 것만 같다.


그러던 중 오늘 오후 지난 회사에서 어렵게 모시고 온 개발팀 동료 미팅을 했다. 동료는 테크리드 역할까지 하며 개발을 하고 있고, 열려있는 마음으로 많은 동료들을 이끌며 자신의 일도 척척 잘 해냈다. 내가 모시고 왔지만 참 잘 데려왔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나의 이런 상황에 대한 정리마저 끝내줬다. 그는 슈퍼맨인가.


그는 내게 말한다. 왜 그렇게 자신 없이 바보같이 있냐고. 그러게... 예전에는 나도 참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바보 같아졌을까. 돌아보니 크게 두 가지 정도가 떠올랐다.


1. 쓸데없는 책임감

아무도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지만 팀원들의 어려움을 몸소 챙겼다. 프로덕트가 원활하지 못하다면 붙어서 개선해 주고 방법을 못 찾을 때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심지어 심리 상태까지 보듬으며 정말 우리 팀을 사랑으로 대하고 성장을 도모했다. 그런데 그 팀이 한순간에 분리됐고 남이 되어버렸다. 책임감으로 쉬지 않고 뛰어가며 함께 이룬 성과에 내 이름은 없었다. 결국 남 좋은 일만 되고 말았고 함께했던 팀원들은 별다른 말 없이 눈치만 봤다.


2. 입 닥치는 악습의 수혈

처음에는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아서 의견 개진이 어려웠다. 새로 온 사람의 도전적인 모습은 누군가에게 눈엣가시로 보일 것이고, 리더급의 연차의 말은 누군가에게 불편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조용하게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의도와 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환경에 놓였다. 팀장과 본부장들의 사이에서 아무 직급도 없는 나는 가마니처럼 있어야 했고, 그게 예의였다. 경직된 분위기는 문화가 됐고, 그런 환경에 입 닥치는 것이 당연한 악습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난 그것을 그대로 흡수해 버렸다. 할 말을, 하지 못하게 됐다.


물론 안전을 느끼지 못하는 환경에서는 누구나 주눅 들 수 있다. 나 역시 이런 환경에서 스스로를 바보로 만들어갔고 변화를 꾀하기보다는 똑같이 찍어낸 바둑알 같이 바둑판에 나열돼 버렸다.


잘 생각해 보면 내 회사도 아니고 여기 관둔다고 다른 회사 못 갈 것도 아닌데, 난 왜 이렇게 스스로를 바보로 만들고 작아지게 만들고 있는 걸까.


이래서는 안 될 것 같다. 결국 감내하지 못한 스트레스는 폭발했고 그것은 내 건강에 적신호를 줬다. 그래, 이대로 죽지 말자. 시원하게 내지르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냥 시원하게 퇴사하자. 까짓 거 인생 한 번 사는 건데, 하고 싶은 대로 좀 가자.


주말 잘 쉬고, 다음 주부터 다시 시작해 봐야겠다. 다시 손목 돌리고 기지개 켜고 힘껏 일어나 보자. 정체성 갖고 살아보자. 할 수 있다.


- 24년 맞이 내게 쓰는 편지


아 참, 읽어주셔서 늘 감사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