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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나리 Jun 27. 2024

2023. 12.

  "주사님, 저는, 다음 발령지가 이 동네만 아니면 돼요."


  그 말은 내가 이 도시에 오던 날 처음 들은 대화였다. 종점까지 달려가는 지하철 마지막 칸에는 공무원들만 바글바글했다. 귀에 꽂은 이어폰, 플레이 리스트 사이 짧은 틈을 날카롭게 비집고 들어온 문장. 처음 이 도시의 땅을 밟은 날 나는 직감했다. 아. 나는 이 도시를 떠나기 전까지 저 문장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부서지는 시멘트 틈에는 낡은 영광이 켜켜이 쌓이고, 녹물과 함께 스며든 세월이 검붉은 자국을 남기는 도시. 서울의 햇빛이 높은 건물과 가로수 사이에 부서져 내리는 반면에 이곳의 햇빛은 가릴 없이 직선으로 쏘아져 내려온다. 햇빛에서는 소금 짠 냄새와 녹슨 쇠 냄새, 곰팡이 냄새 그리고 매연과 담배 냄새가 난다. 요란스러운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면, 자연스럽게 지끈지끈한 편두통이 따라온다.

  삼십 넘는 평생을 한 곳에서만 정착해 살던 나는, 볕이 몹시 뜨겁던 지난 8월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어쩌다가. 나는 그 이끌림을 '어쩌다가'라고 표현했으나, 이사 온 첫날 애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라고 말했다. 언젠가. 애인의 표현에 의하면 이 이끌림은 '언젠가'였다.


  가장 오래된 종착점이 있는 이 도시는 아주 번화한 곳이었단다. 나는 이곳에 온 지 반년도 못 된 새내기라 이 도시 쇠락의 역사는 알지 못한다. 비슷한 도시들이 으레 그랬듯 영화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부서졌으리라 여길 뿐이다. 도시의 곳곳에는 상흔처럼 파도가 지나간 흔적만이 남아있고, 이제 와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물결치며 흔들리는 흔적뿐이다. 흔들리건 물결치건 남은 건 그저 흔적일 뿐이다.


  "여기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아. 그것도 내가 태어나기도 전 시간대에."

  "우리는 둘 다 90년대생이니까. 여기가 번화했던 건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던 시간대겠지."

  "이 도시랑 나는 닮은 점이 딱 하나 있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거. 이상하지. 딱 하나 밖에 그 공통점이 나를 이끌었나 봐."


  재개발은 30년째 소문만 무성하다고 했다. 수많은 정치인이 스쳐가고 크고 작은 정책들이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사이 재개발 관련 사무실만 대여섯 개가 생겼다가 없어졌단다. 평일 낮에도 한가로운 거리에는 떠날 수 없거나, 떠날 필요 없는 낡고 저물어가는 것만이 남았다.


  이 도시에서 내가 새롭게 하게 된 일은 서류를 받고 보완하고 정리하고 처리하는 복지 사업 행정 업무다. 함께 일하게 된 팀원들은 구름의 단면 같은 사람들이다. 산뜻하고 부드럽고 존재하지만 닿을 일 없는. 가끔 고개를 돌려 그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런 관계. 어쩌면 구름의 단면 같은 것은 이방인인 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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