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님, 저는, 다음 발령지가 이 동네만 아니면 돼요."
그 말은 내가 이 도시에 오던 날 처음 들은 대화였다. 종점까지 달려가는 지하철 마지막 칸에는 공무원들만 바글바글했다. 귀에 꽂은 이어폰, 플레이 리스트 사이 짧은 틈을 날카롭게 비집고 들어온 문장. 처음 이 도시의 땅을 밟은 날 나는 직감했다. 아. 나는 이 도시를 떠나기 전까지 저 문장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부서지는 시멘트 틈에는 낡은 영광이 켜켜이 쌓이고, 녹물과 함께 스며든 세월이 검붉은 자국을 남기는 도시. 서울의 햇빛이 높은 건물과 가로수 사이에 부서져 내리는 반면에 이곳의 햇빛은 가릴 것 없이 직선으로 쏘아져 내려온다. 햇빛에서는 소금 짠 냄새와 녹슨 쇠 냄새, 곰팡이 냄새 그리고 매연과 담배 냄새가 난다. 요란스러운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면, 자연스럽게 지끈지끈한 편두통이 따라온다.
삼십 넘는 평생을 한 곳에서만 정착해 살던 나는, 볕이 몹시 뜨겁던 지난 8월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어쩌다가. 나는 그 이끌림을 '어쩌다가'라고 표현했으나, 이사 온 첫날 애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라고 말했다. 언젠가. 애인의 표현에 의하면 이 이끌림은 '언젠가'였다.
가장 오래된 종착점이 있는 이 도시는 아주 번화한 곳이었단다. 나는 이곳에 온 지 반년도 못 된 새내기라 이 도시 쇠락의 역사는 알지 못한다. 비슷한 도시들이 으레 그랬듯 영화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부서졌으리라 여길 뿐이다. 도시의 곳곳에는 상흔처럼 파도가 지나간 흔적만이 남아있고, 이제 와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물결치며 흔들리는 흔적뿐이다. 흔들리건 물결치건 남은 건 그저 흔적일 뿐이다.
"여기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아. 그것도 내가 태어나기도 전 시간대에."
"우리는 둘 다 90년대생이니까. 여기가 번화했던 건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던 시간대겠지."
"이 도시랑 나는 닮은 점이 딱 하나 있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거. 이상하지. 딱 하나 밖에 그 공통점이 나를 이끌었나 봐."
재개발은 30년째 소문만 무성하다고 했다. 수많은 정치인이 스쳐가고 크고 작은 정책들이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사이 재개발 관련 사무실만 대여섯 개가 생겼다가 없어졌단다. 평일 낮에도 한가로운 거리에는 떠날 수 없거나, 떠날 필요 없는 낡고 저물어가는 것만이 남았다.
이 도시에서 내가 새롭게 하게 된 일은 서류를 받고 보완하고 정리하고 처리하는 복지 사업 행정 업무다. 함께 일하게 된 팀원들은 구름의 단면 같은 사람들이다. 산뜻하고 부드럽고 존재하지만 닿을 일 없는. 가끔 고개를 돌려 그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런 관계. 어쩌면 구름의 단면 같은 것은 이방인인 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