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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나리 Jan 14. 2021

도서관의 겨울방학

함박눈 내리는 날에는 …


  눈 내리는 날을 제일 좋아하는 이는 누굴까. 나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예고도 없이 함박눈이 쏟아지자 도서관 앞마당이 왁자지껄하다. 우리 도서관 뒤편에는 놀이터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도서관과 붙어 있는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고 또 하나는 공공시설 놀이터다. 아이들은 횡단보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는 두 개의 놀이터의 이 쪽과 저 쪽을 뛰어다니며 논다. 높은 웃음소리가 환기를 위해 열어 둔 창을 넘어, 관 내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도서관이 운영 중이었다면 필시 민원이 들어왔을 것이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 밖을 내다보니, 놀이터에는 눈이 어른 발목 높이까지 쌓여 있고 눈이 소복하게 쌓인 놀이기구는 그 형태도 제대로 보이지가 않는다. 나는 그 모습에 제설 작업이니 퇴근길 교통대란이니 온갖 잡생각으로 머리가 아찔해지지만, 눈을 만난 아이들은 강아지처럼 팔딱팔딱 뛰고 새 장난감을 선물 받은 듯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그러니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그래 너희라도 즐겁다니 다행이구나,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이다.


  아침 일찍, 제설 작업을 준비한다. 나는 평생 눈을 쓸어본 일이 없었으나 이 곳에서는 내가 눈을 쓸어야 한다. 올 겨울에는 이미 눈이 내리기 전에 여러 번 미끄러져 넘어졌다. 깨진 무릎과 삐끗한 허리가 욱신거려서 나는 살짝 뒤로 빠져 앉았다. 늘 인도 위 깨끗하게 치워진 눈만 봤던 터라, 금방 끝나리라 생각했던 제설 작업이 길어지자 잠시 눈치 보고 빗자루를 들어본다. 손에 쥔 빗자루는 그저 어색하고 몸은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눈이란 것이 이렇게 단단한 것이었나! 한참 끙끙 대다가 이내 다른 이들과 함께 눈 밭에 뛰어 들어갔다. 슬리퍼와 양말이 다 젖어 축축해지도록 눈을 밟고 발자국을 남겼다. 어느새 도서관 앞마당에는 나를 포함한 쓸모없는 인력들이 다 빠져 있었다. 그 쓸모없는 인력들은 눈 속에 제 발자국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결국 눈을 치우는 것은 모두 남자 선생님들의 몫이 되었는데, 그 들만이 빠르게 치우고 빠르게 들어가자는 마음가짐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연초에는 어쨌거나 야근이 많다. (다른 때라고 야근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지난해 벌인 일들을 마무리 짓고, 이번 해 벌일 일들을 한 곳에 모은다. 겨울이라 날이 금방 어둑해진다. 하늘이 짙은 색으로 물들자 이번에는 아빠, 엄마, 아들로 이뤄진 일가족이 도서관 앞마당을 찾았다. 아빠와 엄마는 서로에게 눈을 뿌리고 던지고 문지른다. 부부가 눈싸움을 하는 동안 아들은 그 옆에서 무심히 눈사람을 만든다. 든든한 풍경이다. 아마도 그들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몹시 긴 가족일 것이다. 함께하는 시간이 단단하게 그들을 묶고 있는 것을 흘깃 보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걸 보던 옆자리 사서 선생님은 저걸 다 누가 치우는지 아냐고 투덜댔다. 나야 어차피, 직접 치우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한껏 흐뭇한 미소로 그 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는 눈사람이 아주 많았다. 낙엽 모자를 쓴 작고 앙증맞은 눈사람, 초콜릿 은박지로 한껏 화려한 단추를 단 눈사람, 모자를 쓴 눈사람…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줄 지어 있는 눈사람들을 보며, 왜 사람들이 이렇게 눈사람을 열심히 만든 것일까 고민했다. 다들 집에서 온라인으로 '눈사람 예쁘게 만들기' 수업이라도 들은 걸까. 쓸 데 없는 고민을 하면서 나는 눈 오리를 만들었다. 어쨌거나 이 동네에서 눈을 가장 오래 기다린 사람은 나일 터였다. 늦가을부터 오리 눈 집게를 사서 도서관에 두었으니. 이때만을 기다린 양 눈 오리를 만들었다. 도서관 앞마당은 금방 오리 농장이 되었다. 지나가던 사서 선생님들이 오리 소리를 흉내 내며 웃었다. 꽥꽥꽥


  도서관은 겨울 방학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 겨울 방학이다. 어린이 자료실을 담당하는 사서 선생님이 겨울 방학을 맞아 독서 교실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 자료실이나 청소년 자료실의 담당자들은 '방학'이나 '개학' 등 학사 일정에 아주 예민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도 한 해의 교육 프로그램과 문화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공모사업의 일정도 알아본다. 문화 프로그램 담당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업무다. 일이 없는 것도 바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겨울 방학이다. 우리는 어린이도 학생도 아니고 직장인이니까 이 정도는 어쩔 수 없다. 방학이라기에는 쌓인 업무가 어깨를 짓누르지만, 어차피 학생들도 선행 과제로 바쁜 겨울 방학을 보내고 있을 거다. 그러니 직장인도 어쨌거나 얼렁뚱땅 '겨울방학'이란 이름으로 맘이라도 즐겁고 싶은 것이다.


  생각해보면, 직장인으로서 겨울 방학에는 늘 일주일 정도 짬을 내어 따뜻한 남쪽 나라로 여행을 가곤 했었다. 올 해는 그것도 텄지만. 그래서 나는 겨울 나라에서 눈 오리를 만든다. 그렇게 신나게 눈 오리를 만들다 보니 어째서 올해 길거리에 유독 눈사람이 많았는지 알 것 같다. 다들 비슷한 마음이겠지, 뭐.


  올 겨울은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다. 잠시만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긴 겨울 방학으로 조금 쉬어갈 수 있게. 그리고 새 봄이 오면 쌓였던 눈과 같이 근심 걱정 모두 녹아내렸으면 좋겠다.

  그러나 또,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봄에는 봄의 즐거움이 있겠지. 봄에는 짧아서 더 즐거운 봄방학을 즐겨야지. 이번에는 봄꽃을 기다려 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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