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복직 일기 #1
1년 8개월 만이다. 지난 20개월 동안 나는 내가 아닌 ‘지호 엄마’로 살아왔다. 머리를 제대로 빗을 새도 없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하나로 묶고, 목 늘어난 후줄근한 티셔츠에 때를 잊은 냉장고바지가 나의 ‘교복’이었다. 휴직하기 전 반쯤 남아 있던 메이크업베이스는 그동안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내가 최선을 다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 우리 아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은 나는 뒷전이고, 일분일초 내 아이에게 열과 성을 다하는 게 본분인 줄 알았다. 누워있기만 하던 아기가 뒤집고, 어느새 온 집안을 기어 다니고, 이제는 사방팔방을 뛰며 활보하게 되는 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색깔은 희미하게 옅어져 갔다. 그렇게 나의 에너지를 갈아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돌아갈 곳이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육아휴직이 끝난 후에도 당당히 내 일을 다시 할 수 있다는 것이, 때때로 꺼져가던 나의 자존감에 불씨를 다시 피워주었다. 오늘은 1년 8개월 만의, 첫 출근일이었다.
초등학교 교사. 아이를 낳기 전까지 10여 년간 내가 해 온 일이다. 전교생 오십여 명의 작은 시골 학교에서부터 천 명이 넘는 신도심의 커다란 학교까지. 내 젊은 시절의 열정과 자신감을 쏟아낸 대상이었다. 어제는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진한 커피를 마신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고, 상념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몇 학년을 맡게 될지, 어떤 선생님들과 근무하게 될지 궁금하기만 했다. 빗소리 ASMR을 틀어놓고 겨우 잠을 청했으나, 결국 새벽녘에 잠이 깨고 말았고 그대로 아침을 맞이하고 말았다.
엄마로서 출근한다는 것은 그 전의 출근과는 달랐다. 전에는 아침에 일어나 씻고, 분주하게 아침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내려 집을 나섰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아기가 깰까 봐 조심스레 일어나 머리를 감고 나오니 아기는 이미 잠이 깨서 거실에서 아빠와 놀고 있었다. 나를 이어 육아휴직을 하게 된 남편 또한 이런 상황이 어색한지 아니면 아침잠이 미처 깨지 않은 건지 혼란스러워 보였다. 머리를 말리면서도 자꾸 나에게 다가오는 아기에게 웃어 주고 놀아주다 보니 시간은 어느 틈에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아침 식사로 대충 빵을 챙겨 먹으려고 했더니 어느새 빵 냄새를 맡은 아이가 ‘빵~’하고 달려오는 통에 아기에게도 빵 한 조각을 잘라주었다. 그 사이 시간은 또다시 몇 걸음 도망가버렸다. 그러면서도 이 말은 생략할 수 없었다. 아기를 껴안아 주며 몇 번을 말하고 또 말했다.
“아가야, 엄마 일하고 올게. 아빠랑 할머니랑 잘 놀고 있어. 엄마 이따가 다시 올 거야. 꼭 올 거야.”
예상했던 시간보다 10분 정도 늦게 출발하고야 말았다. 아기를 두고 일터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고 마음은 아렸다.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학교에 도착했다. 겨우 주차장의 빈 곳을 찾아 주차하고 매번 교직원 회의를 하던 3층 교실로 향했는데 불은 꺼져 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곳이 아닌가 싶어 강당으로 가보았더니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때마침 지나가던 처음 본 선생님께 직원 모임 장소가 어디냐고 여쭈었더니, 각 학년 부장실이란다. 내 머릿속에 든 의문은,
‘나는 내가 몇 학년인지도 모르는데?’
결국, 교무실로 갔더니 전 교직원이 사용하는 단체 SNS가 있고 그곳에 학년 배정이 통보되었다고 한다. 내가 휴직한 사이 직원 간 소통 문화도 바뀐 것이다. 다행히 1지망으로 원했던 2학년에 배정되었고, 2학년 부장 선생님의 교실로 향했다.
새로운 것은 설레면서도 두렵다.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나처럼 낯을 많이 가리고 소극적인 사람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휴직 전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들은 대부분 만기가 되어 다른 학교로 이동해 이제 이 학교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도 크게 한몫했다. 부장 선생님의 교실로 향하는 내내 가슴이 얼마나 콩닥거렸는지 아마 옆에 사람이 있었다면 쿵쿵 두근대는 심장 소리를 똑똑히 들었으리라. 언젠가 한 번은 내 이런 속마음을 솔직히 표현한 적이 있었다. 몇 해 전 새로운 학교에서 첫 회식을 하던 자리였는데, 모든 게 낯선 환경이 어찌나 두렵던지 경력이 한참 많으신 선배님께 내 마음을 토로해 보았다. 선배님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나도 아직도 새로운 학교에 가면 떨려.’
그런데 묘하게도, 그 말이 큰 위안이 되었다. 나만 두려운 게 아니라는 것, 낯설고 새로운 것은 누구에게나 정도만 다를 뿐이지 공평한 긴장감을 유발한다는 것. 교무실에서 부장 선생님의 교실로 향하는 몇 걸음 사이에 그날의 풍경이 머릿속을 오갔고 조금의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 긴장을 가득 품은 손길로 교실 문을 열어젖혔고, 내 불안감은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휴직 전 잠시 같은 학년을 했던 선생님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선생님은 반갑게 나를 맞아주며 학년 배정표를 보고 이미 내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셨다. 낯선 곳에서 만난 익숙한 얼굴은 평소보다 더 진한 안도감을 주었다.
2020년에 시작된 코로나는 일상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학교도 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음은 당연했다. 첫 만남을 하는 동학년 선생님들끼리 마스크도 벗을 수 없이 서로의 눈만을 확인하며 인사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하여 전체 교직원이 한자리에 모일 수 없었고, 예정된 연수는 ‘줌’으로 진행되었다. 학교를 쉬느라 줌을 사용해 본 적 없던 나는 당황스러웠다. 급하게 주변 선생님들께 물어물어 앱을 설치하고 가입을 하고 로그인을 했다. 화상 회의에 접속하자 기다리고 계시던 담당 선생님이 연수를 시작하셨다. 질문하면 채팅으로 대답하거나 카메라를 통해 이야기하는 방식이었다. 휴직 전과 너무나도 달라진 모습에 내가 그동안 사회와 얼마나 멀어져 살아왔는지 실감이 났다. 코로나가 무서워 외출도 못 하고 아이와 집안에만 있느라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세히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다음 주부터는 온라인 수업을 위한 연수를 듣게 되는데, 개학 전 내가 배우고 준비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숨 가쁜 오전 일정을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휴직하던 동안 가장 그립던 시간 중 하나가 점심시간이었다. 아이를 보면서 점심을 먹는 것은 전쟁이다. 그저 허기를 채우기 위해 뭐라도 재빨리 위장 속에 집어넣는 과정이다. 아기에게는 한 숟갈 한 숟갈 정성 들여 먹이면서, 나는 아기가 오물오물 음식을 씹는 그 찰나에 반찬이 뭐가 됐든 크게 밥 한 숟갈을 떠 욱여넣었다. 반찬은 대부분 김치와 도시락 김, 그리고 멸치. 학교에서 건강하게 조리해 주는 따뜻한 급식이 그리웠다. 누군가를 먹여주지 않고 온전히 내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고팠다. 점심 역시 코로나로 인해 각자 교실에서 조용히 도시락을 먹었는데, 그마저도 얼마나 달콤하던지. 학기가 시작되면 아이들 급식 지도를 하느라 여유와는 또 거리가 멀어진 점심시간이 되겠지만, 한 끼나마 편안하게 먹는 식사가 너무나도 감동이었다.
오후에는 학년 교육과정의 큰 틀과 주제를 잡는 시간이었다. 학년에서 정한 특색있는 주제가 일 년간 교과 과정과 맞물려 돌아가게 되므로, 중요한 시간이었다. 늘 집에서 아기와 ‘맘마’, ‘지지’ 같은 단순한 말만 반복하다 오랜만에 전문적인 용어들을 접하니 익숙한 듯 새로운 느낌이 묘하기만 했다. 내가 학교를 떠나 있는 사이에 학교는 생동하고 있었고, 멈춰 있던 나와 움직이던 학교 사이의 간극은 점점 커져 버린 느낌이었다. 코로나라는 특수한 상황까지 더해지며 새로이 교직 생활을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달라진 것은 하나둘이 아니었고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1년 8개월 만에 찾아온 퇴근길의 바람은 매서웠다. 일기예보에서는 오늘 우리 지역에 한파주의보가 내렸다고 한다. 주말까지만 해도 따뜻한 봄날 같은 날씨에 괜히 설레곤 했는데,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이 야속했다.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었다. 이날이 되면 예쁜 옷을 차려입고, 꼼꼼히 화장을 하고 본연의 나로서 돌아가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직업인으로서의 나와, 엄마로서의 나는 무 자르듯 딱 잘라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침에 출근을 준비하면서도 내 아이를 챙겨야 했고, 일터에서 일하면서도 불쑥 아이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쓰렸다. 이제 더는 예전처럼 자유롭고 독립적인 직업인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면에서 한 조각 더 완성되었다. 내 아이를 키우면서 체득하게 된 또 다른 눈과 마음의 방이 나를 채워주고 있음을 느꼈다. 자유를 조금 잃은 대신, 내게 필요했던 성숙과 여유를 한소끔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곧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올 테고, 워킹맘으로서의 내 인생 2막도 조금씩 움트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