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낯가림의 역사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장 첫 번째 기억은 대략 내가 대여섯 살이던 무렵으로 추정된다. 부모님은 일하러 나가 집을 비우셨고, 마침 언니마저 놀러 나갔는지 집에는 나 홀로 있던 상황이었다. 우리 집은 시골의 작은 흙집이었는데, 대문도 없고 현관문도 없었다. 그저 오래된 문의 고리만 잡아당기면 덜커덩 외부에서 내부로 순식간에 들어오게 되는 방식이었다. 어린 나는 방에서 따분하게 놀며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밖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왔다. 모르는 이의 소리는 아니었다. 우리 앞집에 사는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할머니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 엄마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듯했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점점 크게 들려오고, 문풍지에 비치는 사람의 그림자가 점점 거대해질수록 왠지 모를 공포감도 켜졌다. 그 순간 나는 방 안에서 문고리를 꼬옥 움켜잡았다. 그 차가운 쇠붙이가 구세주라도 되는 양 양손 가득 힘을 주어 놓지 않았다. 앞집 할머니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분명히 방안에 누군가가 있는 듯한 기척을 느끼셨을 테고, ‘거 안에 누구 있어?’ 하며 바깥에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나는 그냥 무서웠다. 사람 좋은 앞집 할머니가 해코지하기 위해 오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우리 집, 내가 가장 친숙하고 편안하게 느끼는 그 공간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게 싫었다. 왠지 싫었다. 내 기억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는 문고리를 꼬옥 쥐고 있었다.
그 후로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어린 시절 나를 보고 동네 어른들과 친척들은 ‘새침데기’라고 불렀다. 내가 편안한 대상이 아니면 누군가 질문을 해도 단답형으로 대답했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있기만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담임선생님이 적어주시는 생활통지표에는 ‘너무 소극적이다.’라는 말이 항상 적혀있었다. 그 표현은 내 콤플렉스가 되었다. 엄마도 내 소극적인 성격을 우려하는 것 같았다. 엄마를 걱정시키는 건 마음이 불편했다. 그때부터 소극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분투가 시작되었다. 중학교에 가서는 괜히 호들갑을 떨며 친구들을 사귀었고, 낯가림 심한 아이로 보이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이후로도 교우 관계에서 큰 문제는 없었고 처음 보는 사람과도 적당히 웃으며 이야기하는 능력도 다소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애써 만들어낸 또 하나의 페르소나일 뿐, 그 속에 가려진 진짜 나는 늘 두려워하며 떨고 있었다.
낯섦보다 더한 공포가 있다. 어떠한 집단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알고 지낸 지 오래되어 친분이 쌓여 있다. 나만 그 집단의 낯선 이이자 이방인인 상황. 바로 ‘나 홀로 낯섦’이다. 차라리 모두가 처음 만난 사이라면 서로 조심스레 래포를 형성하며 친분이 켜켜이 쌓여가겠지만, 모두가 하하 호호 웃으며 따뜻한 가운데 나만 이제 막 겨울잠에서 깨어나 어리둥절한 개구리가 된 것 같은 상황. 육아휴직이라는 겨울잠을 마치고 직장에 복귀했더니 내게 주어진 상황이 이러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규모가 커 대부분의 일이 학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만큼 같은 학년을 맡게 된 동료 선생님들과의 인화가 중요하다. 올해 같은 학년을 맡게 된 교사들은 나를 포함하여 모두 여덟 명이다. 그중 나를 제외한 일곱 명은 이미 재작년부터 같은 학년을 맡으며 직장 동료로서, 친구로서 정을 쌓아온 사이다. 새 학년 준비 기간을 맞아 출근한 첫날, 자연스레 서로를 간단히 소개하며 시작하리라 예상하며 무슨 말을 할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다른 대화들이 오갔다. 친근하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 대화에서부터 누군가의 집에 놀러 갔던 이야기, 나는 모르는 지난 이 년간의 에피소드들. 안 그래도 보통 사람들보다 두려움이 더 크게 장착된 나의 입은 더욱 굳게 다물어져만 갔다. 하지만 삼십 년을 넘게 살아오며 체득한 눈칫밥 정보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입을 다물수록 나는 더 철저하게 고립될 거라는 경고음이 삐삐 머릿속을 울렸다.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여도 일단 한 번 따라 웃어보고, 얼씨구 추임새도 넣어보고, 기회를 틈타 한마디씩 얹어보기도 했다. 다행히 배려 깊은 선생님들은 이따금 내게 질문을 하며 발언 기회를 주었다. 내 시덥지 않은 말에 웃어줄 때는 감동의 물결이 척추를 타고 흐르는 듯했다.
그렇게 고난의 일주일은 시작되었다. 아무도 모르고 별 의미도 없지만, 그저 내 마음속에서만 치열했던 고난의 분투였다. 일단 아침이 되면 어느 자리에 앉을까부터 고난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너무 가운데에 앉으면 눈치 없이 친한 사이를 갈라놓는 것 같기도 하고, 아예 끄트머리에 앉자니 안 그래도 이방인 격인 내가 더 고립될 것만 같아 아예 끝은 아니지만, 중간에서 살짝 벗어난 자리에 앉는다.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할 때는 과도하게 리액션을 하기보다는 살짝 눈웃음만 짓는다. 잠시 대화의 흐름이 끊겨 있을 때는 ‘이때다!’ 하며 나에 대한 정보를 살짝 흘리며 나에 대한 호기심과 또 다른 질문을 유도한다. 점심시간 메뉴를 고를 때는 눈치껏 제일 많이 언급되는 메뉴를 캐치한 후, ‘저도 이거요!’라고 외친다. 서로 간의 업무를 나눌 때는 너무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게끔 적당히 힘든 업무를 자처하기도 한다. 그렇다. 이것은 지나치게 소심한 사람의 어처구니없는 생존기이다. 다른 선생님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들은 나를 대화에서 배제하지도 않았고, 먼저 말도 걸어주었으며, 세심하게 하나씩 챙겨주기도 했다. 그저 나의 성격이 이런 탓에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오갔을 뿐이다. 과거에는 이런 내가 싫었다. 당당한 ‘인싸’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니다. 나는 그저 이런 사람이다. 작은 것에도 생각이 많고, 남의 눈치도 많이 보고, 그렇지만 최소한의 내 모습은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 그런 나를 스스로 다독이며 내 눈에만 보이는 견고한 그들만의 끈 사이로 조금씩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게 내게 주어진 과제인 거다.
해마다 학교에는 전입생이 온다. 전학 온 아이들의 낯설어 긴장된 표정을 보면 내 마음속 어떤 버튼이 꾸욱 눌리는 기분이 든다. 바로 공감 버튼이다. 그 아이들의 눈을 들여다보면 긴장하며 떨고 있는 내가 보인다. 처음 발을 들여놓은 낯선 공간 속에서, 나를 제외한 아이들은 이미 무리를 지어 놀고 있는 상황. 아이들의 긴장감은 이내 공포로 바뀌기도 한다. 아직 사회적 기술이 다듬어지지 않은 아이들은 친구들의 관심을 끌어 보고 싶은 마음에 다소 당황스러운 일을 하기도 한다. 뜬금없이 혼자 들떠 이야기를 한다든지, 괜히 과장하여 말한다든지. 그런 모습 속에 유난히 호들갑 떨며 이야기하던 학창시절의 내가 겹쳐 보인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춰보고자, 더욱 크고 밝게 나를 포장하는 것. 이것조차도 두려워 가만히 있기만 하는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더 가슴을 아프게 한다. 유난히 예민하고 민감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채 어루만져 주는 것. 내 낯가림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지만, 그런 성격을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최선 아닐까. 아무도 몰라주고 의미도 없는 혼자만의 분투는 올해도 꽤나 치열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