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지독히도 퍼붓던 비였다. 남부지방을 휩쓸고 간 장마전선은 내가 사는 곳 여기저기에 커다란 생채기를 남겼다. 그중 내 가슴을 철렁이게 한 소식이 있었다. 고향에서 산사태가 나서 민가를 덮쳤다는 소식이었다. 사람이 매몰되었고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몇 줄의 기사에 심장이 뛰고 눈물이 차올랐다. 조카를 돌보러 언니네 집에 가신 어머니의 부재 때문에 홀로 고향 집에 계실 아버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산 아래에 있어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다며 늘 푸근해하던 고향 집의 입지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전화를 해 볼까, 그런데 아빠가 안 받으시면 어떡하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곧바로 새롭게 뜬 기사를 발견했다. 사고가 난 곳은 우리 마을이 아닌 다른 마을이었다. 하지만 안도감이 들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는 무사했지만, 뜻밖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을 두고 ‘우리 가족이 아니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가슴 철렁했던 순간은 이번뿐이 아니었다. 아기를 뱃속에 품은 지 열 달이 되던 만삭의 몸이었을 때다. 꼭두새벽부터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는 언니였다. 평소에도 전화 통화보다는 톡으로 주로 대화를 했었기에 이른 새벽부터 언니가 전화를 건 게 이상하기만 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전화를 받았더니 전화기 너머에서는 놀랍게도 언니의 흐느끼는 소리만 가득했다.
“언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이 말만을 반복했지만, 언니는 그저 흐느끼기만 할 뿐이었다. 퍼뜩 무서운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혹시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언니가 말도 못 할 정도로 슬픈 일이 우리에게 생긴 걸까?’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삼키며 언니에게 왜 그러냐고 소리쳐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몇 분이 흘렀을까. 드디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들려준 언니는 뜻밖의 말을 했다.
“엥? 전화가 걸렸네. 야, ○○이가 장난쳤나 보다.”
이어서 들려오는 세 살배기 조카 ○○이의 웃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히히히히….” 내가 흐느끼는 소리로 착각했던 것은 바로 조카의 숨넘어가는 웃음소리였던 것이다.
어이없는 에피소드에 불과했지만 사실 나는 그 전화를 끊고 한참을 울었다. 자고 있던 남편을 붙잡고 너무 무서웠다며 엉엉 흐느꼈다. 잠시나마 혹시 부모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그토록 큰 것이었을 줄은 몰랐다. 그때부터였다. 요즘은 너무 어린 나이라 경로당 출입도 안 된다는 60대 부모님이시지만, 점점 시간이 흘러갈수록 언젠가 마주하게 될 그 순간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만 간다. 젊은 날의 엄마와 아빠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언니와 나를 낳고 화목한 네 식구가 탄생했다. 나 또한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하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 아기를 안게 되었다. 가족이 생긴다는 건 평생을 함께할 든든한 동반자이자 사랑의 대상을 얻게 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검고 짙은 바다 같은 두려움도 동반한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간다면 나는 괜찮을까? 온전히 살아갈 수 있을까?
아기가 태어나고부터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보다 먼저 떠나가는 이들에 대한 아픔도 있겠지만 내가 먼저 떠남으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라고. 이제야 겨우 한 손으로 벽을 잡고 일어서서 ‘엄마, 엄마’ 소리를 내는 작은 아가를 두고 내가 먼저 간다면 나는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우리 아기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상상만으로도 밀려오는 슬픔의 파도 속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져만 간다.
유시민 작가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어떠한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할지를 논한 책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어떻게 살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주제는 ‘죽음’이었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어떻게 준비하고 떠나갈 것인가. 죽음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준비할수록,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해진다.
두려움에만 휩싸여있기에는 나의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하고 짧다. 조금만 고개를 들어 생각을 바꾸어보면 나의 작은 마음을 다독여 해야 할 일들이 보인다. 바로 후회할 일을 적게 만드는 것이다. 부모님께 한 번이라도 더 전화를 드리고 찾아가서 손주를 보여드리는 것, 비싸지 않아도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것, 일상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도란도란 나누는 것, 아버지의 구멍 난 러닝셔츠를 새것으로 바꾸어 드리는 것, 엄마가 좋아하는 미스터트롯 CD를 사드리는 것. 내 아기와 남편을 더 자주 안아주고 그들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것.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언젠가는 떠나가는 게 순리인 것을, 두려움보다는 하루하루 내가 나눌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들이 존재하기에 나도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