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戀愛談] ‘연애’=신성함의 역사적 연원
우리 연애하지 않을래?
풋풋한 스무 살의 가을의 재수생. 수능을 얼마 안 남긴 그 칙칙한 어느 날. 함께 한샘학원 근로장학생으로 지우개질하며 친해진 그 녀석이 나에게 갑작스럽게 꺼냈던 이 말.
“뭐래는 거야~?”하고 웃으며 받아치고, “어우, 그렇지?”하며 답변도 왔지만. 회색 나이키 운동복을 입은 녀석과 어제도 입었던 일자 청바지에 간절기용 바람막이를 휘뚜루마뚜루 걸쳤던 나, 늘과 같은 우리였지만. 항상 그 자리에서 빈번한 문 열림에 바쁜 노량진의 J 서점에서 구입한 문제집, 그 옆의 못난이 핫도그집, 건너편의 제가 살던 고시원. 언제나와 같았지만. 뭐랄까요. 그냥 그 별 아닌 문장에 손바닥이 붉게 물드는 건 어쩔 수 없었어요. 세 갈래 길 끝의 단풍처럼 말이죠.
참, 그 말이 좋았습니다. ‘연애하자’는 말. 우리 때 흔히 쓰던 ‘사귀자’라는 말과는 달랐어요. 비록 그 일이 있던 바로 다음날 학원 내 또 다른 장학생 언니와 사귀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들려왔고, 알고 보니 나 말고도 여럿에게 수없이 걸었던 장난 아닌 장난이기도 했다지만. 드러운 기분에 일주일 동안 맥주독에 빠져서 11월 마지막 모의고사를 그지 깽깽이같이 보고 인생 때려치울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는 했지만.
뭐 그래요, 그냥 연애라는 말은 참 설렜어요. 사실, 스무 살이 잘 쓰는 말은 아니잖아요. 연애.
그래서인지 무언가, 고급져 보였어요. ㅎㅎ 가볍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마음 쓰리고 애린 절절한 사랑과는 또 달라서 무겁지도 않았지요.
연애라는 말. 왜인지 모르게 그 설레는 말맛. 어쩜 연애는 연애라는 말생김부터 그렇게 예쁜지!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오늘은, 연애라는 ‘말’을 한번 파헤쳐 보려 해요.
연애는 한자어예요. 戀愛. 그리워할(사모할) 연戀과 애정할/사랑할 애愛의 합성어입니다.
그럼 우리는 언제부터 '연애'를 '연애'로 불러왔을까요? 언제부터 연애라는 말이 출현하였는지는 단언하기 어렵습니다만, 적어도 '연애'라는 단어를 '사랑하는 사람 간의 애틋하고, 그리워하며, 단순히 성적인 것을 넘어서 감정적인 측면을 깊이 있게 포함하는' 용어로써 이해한다고 전제하면, 연애는 1910년대 즉, 근대 식민지 시기를 전후해서 수입되어 온 용어/ 번역어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연애는 영어 ‘love’를 번역하기 위해 고안된 일본의 신조어였다고 합니다. 그럼 일본의 상황부터 볼까요? 야나부 아키라柳父章의 《번역어 성립 사정翻訳語成立事情》에 따르면, 에도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부터 일본에서는 ‘연애’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는데요. 이때의 연애는 동사 love의 번역어이지 명사 love의 번역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연애하다라는 동사의 어근이었던 것이지요. 1870년경 나카무라 마사나오가 번역한 《서국입지편西國立志編 原名 自助論》에서 그 최초의 용례를 살필 수 있습니다.
to have fallen deeply in love with a young lady of the village,
➜ 李는 일찍이 마을 처녀를 본 뒤 깊이 연애하였으니,
원래 일본에서 남녀 간의 사랑은 육체적인 결합과 분리되지 않아 온 전통이 깊었습니다. 사랑을 뜻하는 단어 역시 주로 연戀이나 정情, 색色 등이 선택되는 경우가 많았지요. 문명개화의 시대를 살았던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성적인 관념이 배제된 love 개념을 기존의 일본어들로는 번역하기 어려웠다고 여겼던 것 같아요. 그리하여 남녀에 특정한 관계들 중 그 의미에서 육체를 분리하고 ‘고상한 정신성’을 담은 것, 그것의 번역어로서 ‘연애’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미의 연애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일본의 평론가 이와모토 요시하루巌本善治가 본인이 창간한 여성교육 잡지 《女學雜誌》에서 자신의 연애관을 펼치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이와모토 요시하루는 버서 클레이Bertha M, Clay의 장편소설 Dora Thorne의 번역본인 《은방울꽃谷間の姫百合》에 대한 서평에서, 불결한 어감을 가진 일본의 단어들로는 “맑고 올바른”, “영혼에서 우러나와 사랑하는” Love의 감정을 번역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때문에 ‘연애’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자는 것이었지요.
이후 연애는 해당 잡지의 중심소재로 우뚝 서며 상당한 인기를 끌게 됩니다. 이와모토 요시하루의 뒤를 이어 기타무라 도코쿠北村透谷 등의 주자들이 계속해서 연애를 논했고, 그 결과 일본에서는 낭만주의 시대가 꽃피었다고 해요.
요컨대 남녀 간의 사랑이라 하면 곧 성적 결합을 연상했던 동아시아의 전근대적 풍토에서, 성적 접촉을 기피하거나 생략하고 상대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혼의 순정을 바치는 기사도식 love의 개념은 이해되기 어려웠고, 그렇기 때문에 그때로서는 고결해 보이는 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가 ‘연애’라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나라에서는 어땠을까요? 역시 일본에서 번역된 연애를 수입한 한국에서도 연애는 곧 ‘신성함’과 연결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한국에서 남녀 간의 연애를 지칭하는 용어가 처음 발견되는 사례는 1910년대 초반의 신소설들에서라고 합니다. 1912년 《매일신보》에 발표된 조일제의 「쌍옥루」에는 ‘사랑’, ‘연애’, ‘편애’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었는데요. 특히 “청년 남녀의 연애라 하는 것은 극히 신성한 일”이라 이야기하죠. 1913년 같은 신문에 연재된 「장한몽」에서도 연애는 신성함의 상징으로 비춰지는데요.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김중배의 물질적으로 화려한 모습에 현혹된 심순애가, 이수일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신성한 물건인 연애”의 힘으로 “봄 해에 눈 녹듯” 속된 욕망을 깨끗이 잊어버리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수입 이후 드물게 보였던 연애는 1910년대 중반까지도 희귀한 어휘였어요. 그러다 1910년대 후반을 지나며 애정, 친애, 상사, 사랑 등과 경쟁하며 연애라는 어휘의 쓰임이 점차 빈번해지기 시작되고, 특히 1919년 3·1 운동 이후 1920년대, 교육열과 문화열이 팽창해 가던 시기가 되면 하나의 유행어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게 됩니다. 신성한 연애의 승리였지요.
아니 그러니까 ‘사귀자’가 아닌 ‘연애하자’는 그 말에 내가 덜컹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저리도 고상한 단어인데요!
이처럼 연애는 사랑을 의식으로 변화시키고, 육체에의 애욕을 배제함으로써 감각적이고 정신적인 사유로서 전환시키는 용어였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다고 이 연애가 정신적인 사랑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당시 연애와 더불어 유행한 단어로 ‘영육일치의 사랑’이 있었는데요. 세계적인 여성 운동가인 엘렌케이의 사랑론에서 주창된 것이고, 우리나라의 자유연애론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요.
엘렌 케이는 연애란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강한 힘이 있으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한 사랑이 있는 커플이 결합하여 낳는 2세가 우수하다 하였습니다. 따라서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것은 자유로워야 하며, 이러한 사랑은 영원하지 않으니 이혼 역시 자유로워야 한다고도 말했지요. 소위 자유연애론입니다.
자유연애. 영혼에 천착하는 용어였던 신성한 연애가, 어떻게 영육일치의 사랑과 공존하게 되었을까요?
첫째, 엘렌 케이가 제창했던 견해가 당시 여성들에게는 ‘여성 해방’을 의미했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엘렌 케이의 사랑론은 기존에 삼종지도, 칠거지악 등 봉건 질서에 억압당해 온 한국의 여성들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도 같았습니다. 개인의 인격 존중, 개성의 자각, 구습의 탈피로 인식된 자유연애는 근대적인 이상이었고, 신여성들에게는 누구나 따라야 하는 도덕과 새로운 사상이었던 셈이었지요. 엘렌 케이의 이론이 신봉됨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영의 연애는 영육일치의 자유연애로 옮아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둘째, 연애를 ‘우수한 자녀’를 낳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에 민족적 정당성이 부여된 것도 영육일치의 연애가 지향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시대적으로 큰 영향력을 지닌 과학이론이었던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은 성적 결합의 문제에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는 건데요. 즉, 엘렌 케이는 연애의 궁극적인 목적을 인종의 개량에 두고, 우수한 인종으로 나아가기 위해 연애의 자유와 영육이 일치되는 결혼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영구히 보존키 위하야 이성의 결합을 구하는데 연애를 전제로 한다. 그럼으로 연애는 신성하다.
- 김영보, 「실제록」, 『조선문단』10호, 1925.7.
이러한 엘렌 케이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연애가 신성한 이유는 그것이 자녀를 생산하는 일이기 때문이며, 자녀의 생산은 국가 민족을 이어가기 위해 중요한 일이다. 때문에 다재다능하고 총명강장한 자녀를 낳아야 함이 강조되고, 그렇기에 남녀는 우수한 서로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됩니다. ‘종족의 발전을 위해’ 개인의 행복을 자유한 연애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분히 제국주의적인 과학 지식의 영향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 덕에 ‘연애’, 정확히 말하면 ‘자유연애’는 공식적으로 정당한 용어이자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유행어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핑계가 좋잖아요. 민족을 위해!
그리하여 연애라는 번역어는 안착함과 동시에 근대의 한국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감정과 육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유교적 인식 틀 안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상상력을 촉발시켰지요. ‘신성한 연애’는 혼인에 필요한 전제 조건이면서도 혼인을 초월하는 자유여야 했고, 사랑의 정신적 측면에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육체와 본능 역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연애라는 ‘말’은 그 기원에서부터 신성하고, 고상하였던 겁니다. 저속하고 부조리한 전통의 사랑을 지워내기 위해 고심 끝에 조합된 단어인 데다가, 아니 심지어 섹스를 함의한 배경조차도 ‘자유한 여성 해방’, ‘종족의 발전’을 위함이었다 하니 이 얼마나 고결합니까.
어때요. 연애. 어제까지도 그저 남자 사람1에 불과했던 녀석이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어데서 BGM이 샤랄라 하게 깔리고 세상은 모두 무채색으로 변모하더니 너와 나만 분홍빛으로 감싸지는, 그 어마무시한 CG효과를 동반한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 생경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다가도 클리셰 하게 이어지는 다음 코스를 예상케 만드는 그런 단어. ‘연애’. 그럴만하지 않습니까? 맞지요?
*참고문헌
간노 사토미(손지연 옮김), 『근대 일본의 연애론』, 논형, 2014.
권보드래, 『연애의 시대』, 현실문화연구, 2003.
김경일,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푸른역사, 2004.
김지영, 『매혹의 근대, 일상의 모험』, 돌베개, 2016.
야나부 아키라(김옥희 옮김), 『Freedom, 어떻게 自由로 번역되었는가』, AK, 2020.
清地ゆき子, 「日中語彙交流における近代訳語の受容と変容: 民国期の恋愛用語を中心に」, 筑波大学 박사학위논문,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