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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영 Apr 01. 2022

1. 돌아올 곳 없이 떠나는 여행은 방황이다.

내가 힘겨움 앞에서 선택한 해결책은 매번 도망이었다.

살면서 내내 정착을 꿈꿨던 내가 일상처럼 여행하는 남자와 결혼하다니.

에두아르에게 여행은 일상의 연속이다. 일상처럼 여행하는 미친 책벌레는 시도 때도 없이 책 읽기, 중요한 물건 잃어버리기, 현금도 덩달아 잃어버리기, 넘어지고 자빠지기, 오지랖 떨다가 사람들에게 미움받기 기타 등등을 여행지에서도 그대로 되풀이한다.


결혼 전 나는 에두아르와는 다른 이유로 여행 같은 삶을 살았다. 나는 이십 대부터 삼십 년 가까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도망치듯 살아왔다. 소심한 이상주의자인 나는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버거워했다. 사랑했던 남자와의 이별조차 받아들이지 못해 오래 방황했다. 내가 힘겨움 앞에서 선택한 해결책은 매번 도망이었다. 그러면서도 비겁한 도망자가 되기 싫어 ‘여행’이라는 말로 포장하며 살아왔다. 그런 여행에 지친 나는 항상 정착을 꿈꾸며 살았다.


결혼해 프랑스에 살게 되면서 이제는 긴 여행을 끝내고 정착할 줄 알았다. 그러길 바랐다. 일상처럼 여행하는 남자와 결혼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에두아르는 책에만 미친 게 아니라 여행에도 미친 사람이다. 살면서 내내 정착을 꿈꿨던 내가 일상처럼 여행하는 남자와 결혼하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 미친 책벌레이자 지구 최강 오지랖인 남편 때문에 미치지 않기 위해 쓴 글들은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라는 에세이로 출간했다. 


여행에 미친 책벌레와의 결혼생활에 적응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드넓은 아량과 쇠심줄 같은 인내심을 키워야 했다. 덕분에 이제는 스키 타러 가면서 논술 과제물 들고 가는 것도, 친구들에게 강의하느라 정작 하려던 일은 하지 못하는 것도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걸 잃어버리는 꼴을 보는 것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내공이 생겼다.


전화벨이 울렸다. 올리비에였다. 봉사활동으로 난민 학생들과 썰매를 타러 간 베로니크가 양쪽 발목 골절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일행 모두가 크게 놀라며 걱정했다. 나는 걱정이 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양쪽 발목에 깁스를 한 채 꼼짝없이 누워 있을 못 말리는 베로니크를 생각하니 예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몇 해 전에 스키장에서 오른쪽 발목이 부러져 철심을 다섯 개나 박는 수술을 받았다.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떠오른 생각은 한 달 전에 예약해놓은 로마행 비행기 티켓이었다.

보름 뒤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로마 여행을 해도 될지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는 출발 전에 항응혈제 주사를 꼭 맞고 진통제와 목발을 챙겨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말라고 했다. 가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헷갈렸지만 나는 로마에 사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로마 여행 강행 소식을 알렸다.

“의사가 몇 가지만 조심하면 여행해도 된다고 했어. ”


여행이라면 ‘이젠 그만’ 했던 내가 목발까지 동원해 네 발로 여행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로마에 동생이 살고 있긴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내 안에 ‘정착’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는 것을.

프랑스의 마시프상트랄에서 포니와 함께

여행은 돌아올 곳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돌아올 곳 없이 떠나는 여행은 방황이다.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마침내 에두아르와 지지고 볶으며 일상처럼 여행이 반복되는 결혼생활을 정착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꼴을 하고서도 여행을 하는 지경에 이른 나. 오랜 소망이 드디어 이뤄진 것이었다.



              

'한국의 빌 브라이슨' 이주영이
'프랑스 책벌레' 라틴어 선생과 함께 한 10년간의 여행,
여행 과로사 직전에 외친 '여행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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