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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영 Apr 08. 2022

5. 수백년 된 문화재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

정의의 사도 오지랖퍼 프랑스인 남편 vs 뻔뻔한 벨기에 여행자들

우르비노의 팔라초두칼레는 원래 페데리코 공작의 할아버지가 심플하게 지은 건물이었는데, 페데리코 공작이 야심차게 리모델링한 결과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풍 궁전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페데리코 공작의 취향은 무척 세련되고 고급스러웠던 것 같다. 궁전 내부의 모든 것이 과하지 않고 기품이 넘쳤다. 프랑스인들을 자극할 것 같아 이름을 밝히지는 않지만, 프랑스의 엄청 유명한 한 궁전은 화려함이 도를 지나쳐 돈을 처발랐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과거 프랑스에서 돈지랄을 가장 많이 한 왕이 지은 그 궁전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지나치게 화려한 것에서 천박함을 느낀다.


‘가장 아름다운’이라는 표현이 남발되는 것 같지만 우르비노의 팔라초두칼레는 정말 대단히 아름다운 건물이다.


궁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기품이 넘치는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서 한 남자가 영어로 꽥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만지지 마시오! 이건 만지면 안 된다고!”

성추행이라도 당한 것일까?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잠깐, 저 목소리는 내가 잘 아는 남자의 목소리가 아닌가? ‘만지지 마시오’는 그 남자가 박물관에 갈 때마다 입에 달고 가는 소리고. 또 시작하셨군. 이번엔 ‘You can’t touch this’라니! 지가 MC해머냐?

나는 얼른 에두아르 옆으로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프랑스어로 물었다. 에두아르는 앞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키면서 남자가 궁전 안의 엄청 근사한 나무문 장식을 손으로 만졌다고 프랑스어로 말했다. 그때였다. 앞의 남자가 벨기에 억양의 프랑스어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렇지! 당신 프랑스인이지? 어쩜 이렇게 프랑스인다우실까! 당신은 아주 전형적인 프랑스인이셔! 잘난 척과 오지랖이 하늘을 찌르시지!”

궁전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우리를 쳐다봤다. 정말 쪽팔렸다. 하지만 아무리 쪽팔려도 남자에게 한마디 해야겠다 싶었다. 벨기에 남자가 문을 만진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솔직히 나도 그 문을 보면서 만질 뻔했다. 나무문의 조각은 환상적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갔을 것이다. 너무 아름다운 것들은 이성을 마비시켜 의도치 않은 행동을 하게 만든다. 에두아르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조용하고 정중하게 만지지 말라고 하면 될 것을 그렇게 성질을 내면서 소리를 지르니 상대가 당황할 수밖에. 아무리 그래도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그 아름다운 문은 만지면 안 되고 그것을 만져서 지적받았으면 조용히 찌그러져야 한다. 그런데 남자는 뻔뻔스럽게도 에두아르에게 소리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벨기에 남자에게 말했다.

“여기서 프랑스인이 어떻고가 왜 나옵니까? 당신이 잘못한 건 사실이 아닌가요? 이 문을 만져서는 안 된다는 걸 모르진 않으셨죠?”

나는 상당히 차분하게 말했지만, 말싸움이 장기전으로 가는 데 한몫하고 말았다. 벨기에 남자는 아내와 십 대 중반의 아들 두 명과 함께였는데, 그의 아내는 창피했는지 살짝 뒤로 물러서고 그와 아들 두 명은 도끼눈을 뜨며 우리를 노려보면서 프랑스인 욕을 해댔다.

아무리 그래도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그 아름다운 문은 만지면 안 되고 그것을 만져서 지적받았으면 조용히 찌그러져야 한다.


결국에 궁전 관계자가 나타나 싸움을 말렸다. 싸울 때는 몰랐는데 싸움이 끝나고 나니 보통 쪽팔린 게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생긴 것도 다른 방문객보다 눈에 잘 띄어서 궁전 어디에 가나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어쨌든 에두아르와 내가 잘못한 것은 없으니까. 문제는 내 튀는 외모 때문에 벨기에 남자의 아들 두 명이 우리를 쉽게 알아보고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싸움 종료 후에도 두 소년은 눈에 도끼를 달고 주먹을 불끈 쥔 채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성질 같아서는 “이 호적에 잉크도 안 마른 시끼들아, 그렇게 티껍게 쳐다보고 주먹 쥐고 다니면 어쩔 건데? 니들 내가 완전 개 같은 성격의 소유자라는 거 모르지? 개지랄이 어떤 건지 한 번 보여줘?”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그러면 또 주목받을 것 같아 꾹꾹 참았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에두아르가 옆에서 속이 뒤집히는 소리를 했다.

“우리 궁전 관계자한테 보디가드 붙여달라고 할까?” 

“너 설마 쟤들이 무섭냐?”

“아니… 그게 아니고 신경 쓰여. 혹시 아냐? 쟤들이 칼이라도 들고 다닐지?”

이 말은 무섭다는 소리잖아!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 찌질이가 내 남편인걸. 겁에 질린 남편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걱정하지 마. 저것들이 허튼짓하면 내가 현란한 택견 동작으로 기선제압을 할 테니까.”

참고로 나는 택견을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다. 내 말이 무척 든든했는지 에두아르는 그때부터 내 팔짱을 끼고 다녔다. 찌질함을 참아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더워 죽겠는데 팔짱까지 끼고 다녀야 한다니.

“우리 이러지 말고 그냥 밖에 나가서 점심 먹고 올까?”

한번 떠본 것이었다. 평소라면 몇 시간 더 뽕을 뽑아야 할 에두아르가 순순히 좋다고 했다. 아놔, 참! 또 한 번 속이 터졌다. 


좋은 환경에서 천천히 식사를 시작하자 에두아르는 정상으로 돌아오고 나의 짜증도 누그러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기다리고 있을 때쯤 테라스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무리에서 우리는 여섯 개의 도끼눈알을 봤다. 우리는 맛있는 이탈리아 커피를 음미하기는커녕 원샷해버리곤 서둘러 궁전으로 들어갔다. 아니, 도망쳤다. 그렇게 도끼눈들과의 악연이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우르비노의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공원 언덕에도 그들이 있었다. 아시아인 관광객이 없는 그곳에서 나를 단번에 알아본 그들은 에두아르를 끊임없이 노려봤다. 정말 징했다. 뒤끝이라면야 나도 만만치 않다. 나도 같이 노려봤다.

“그냥 무시해. 그만 노려봐. 그러다 네 눈 돌아가겠다. ”

에두아르가 내 눈알을 걱정하며 말렸다. 나는 에두아르가 시키는 대로 눈알 위치를 정상으로 돌린 후 택견 동작을 취하며 말했다.

“이크! 에크! 덤비기만 해봐라! 내가 다 무찔러버릴 테다!”

에두아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웃음이 났다. 우리는 노곤한 오후 햇살 아래 아름다운 우르비노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한바탕 웃었다.




'한국의 빌 브라이슨' 이주영이
'프랑스 책벌레' 라틴어 선생과 함께 한 10년간의 여행,
여행 과로사 직전에 외친 '여행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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