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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영 Apr 07. 2022

4. 뭔 놈의 여행이 이렇게 매번 수학여행 같은가

여행에 미친 남편 에두아르와 프랑스 알레시아 전투박물관에 가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프랑스 응원단이 경기장에 수탉을 들고 나타나 눈길을 끈 적이 있다. 나는 그때 그들이 왜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도 아니고 돌대가리의 상징인 닭을 들고 설치는지 몰라 의아했다. 프랑스 응원단이 묵는 숙소에서는 닭을 데리고 가도 괜찮다고 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라틴어 ‘갈리’에 ‘수탉들’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인들은 국제경기가 있는 축구장에 수탉을 데리고 다닐 만큼 자신들의 조상인 갈리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에두아르는 프랑스를 엄청 비판하고 못마땅해하지만 사실 그 밑바탕엔 조국에 대한 애정이 있다. 그가 알레시아전투박물관을 견학 장소로 선택한 것도 갈리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알레시아 전투박물관(출처: http://www.tschumi.com)


박물관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에두아르는 알레시아 전투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의 설명을 내 식으로 번역하자면 이렇다.

이십 대 후반의 젊은 베르킨게토릭스는 “뭉쳐야 산다, 뭉쳐서 로마로부터 자유로워지자”라고 작렬하는 카리스마로 호소했고 모든 갈리 부족은 뜨거운 가슴으로 하나가 되어 ‘갈리부족연합군’이 조직된다. 늘 로마군에게 당하기만 하던 갈리가 드디어 로마군과 맞짱 뜰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영화였다면 뜨거운 가슴으로 뭉친 부족연합군의 승리로 피날레를 장식하며 눈물 콧물 다 빼는 감동을 선사했겠지만, 현실은 달랐다. 결과는 로마군의 승리였다.


“에이, 뭐야? 졌어? 그럼 우리가 지금 가는 박물관은 패전 기념 박물관이냐?”

운전 중이던 에두아르가 나를 살짝 흘겨보더니 말했다.

“내 가방에서 《갈리아 전기》 꺼내서 7부 89번 소리내서 읽어!”


예전에 외할머니가 학교 선생과는 절대 결혼하지 말라고 했다. 학교 선생인 막내딸을 둔 외할머니는 “선생들은 학교에서 제자들한테 뭐든 시켜버릇해서 아무한테나 명령조로 시킨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하지만 이미 결혼해버린 걸 어쩌랴. 나는 선생 남편이 시키는 대로 책을 소리내어 읽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이 전쟁을 자신의 개인적인 이권을 위해서가 아닌 갈리부족연합의 자유를 위해 시작했다고 말했다.”

“오케이! 거기까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전쟁의 결과보다 그 의의가 더 중요한 거야.”

어쩌면 외할머니는 막내딸이 맨날 뭔가를 시켜서 못마땅했던 게 아니라 가르치는 듯한 말투가 재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박물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에두아르의 설명은 무척 디테일했다. 부족연합군과 로마군이 서로 어떤 전략을 세워 싸웠는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박물관 전시품도 알레시아 전투의 전략을 설명하는 지도밖에 없었다. 나 같은 방향치는 보기만 해도 뒷골부터 당기는 지도 말이다. 나는 지겨워 환장하겠는 걸 꾹 참으며 애써 흥미로운 척 연기까지 했다. 만약 내가 한국의 3·1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에두아르가 하품이나 하며 멍때리고 앉았다면 무척 기분이 나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알레시아 전투박물관과 망루가 세워져있는 공원(출처: http://www.tschumi.com)
로마군 망루

박물관 견학을 마치고 나와 면적이 70제곱킬로미터나 된다는 박물관 앞 공원을 걸으면서도 에두아르의 강의는 계속되었다. 멀리서 나무로 만들어진 망루가 보였다. 알레시아 전투 당시 카이사르의 전략에 따라 만든 망루를 재현한 것이라며 굳이 가까이 가서 보자고 했다. 어차피 짝퉁인데 가까이 가서 보면 뭐하나 싶다가 얼른 마음을 바꿔먹었다. 언젠가 내가 사는 서촌의 개조된 한옥을 보고 ‘짝퉁’이라 비웃던 외국인 친구의 말에 기분이 상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짝퉁’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스스로가 창피했다.

요네하라 마리의 《프라하의 소녀시대》에는 이런 문장도 있었다.


다른 나라, 다른 문화, 다른 나라 사람을 접하고서야 사람은 자기를 자기답게 하고, 타인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 자신과 관련된 조상, 문화를 키운 자연조건, 그 밖에 다른 여러 가지 것에 갑자기 친근감을 품게 된다고. 이것은 식욕이나 성욕과도 같은 줄에 세울 만한, 일종의 자기보전 본능이랄까 자기긍정 본능이 아닐까.


프랑스인들은 누가 뭐래도 꿋꿋하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문화를 근사하고 돋보이게 만드는 기술자들이다.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잘난 척한다 싶을 때도 있지만 스스로가 자기 것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그것이 소중한지 알겠는가? 자기가 자기를 보전하고 긍정하지 않으면 누가 그렇게 해줄 것인가? 요네하라 마리의 말대로 그것이 ‘본능’이라면, 본능을 거스르기보다 깨닫는 게 더 중요할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선택한 것보다 자신, 가족, 민족처럼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에 더 집착하는 것 같다.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강한 집착이 요네하라 마리가 말하는 ‘본능’이 아닐까? 여러 외국에서 살아온 나는 점점 본능에 충실하게 된 것 같다.



* 이 글은 <여행선언문>의 일부 글입니다.


'한국의 빌 브라이슨' 이주영이
'프랑스 책벌레' 라틴어 선생과 함께 한 10년간의 여행,
여행 과로사 직전에 외친 '여행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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