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은 조용했다. 나는 혼자였다.
이른 아침인데도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두 시간 정도 올랐을까? 산장 쪽으로 가는데 뭔가 이상했다. 꿈이라도 꾼 걸까? 산장이 사라졌다. 내가 아무리 방향 감각이 없다 해도 왔던 길을 되돌아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분명 산장에서 조금밖에는 벗어나지 않았는데 산장과 그 많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는 게 말이 되는가? 뭐에 홀린 것처럼 황당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일단 산장을 찾아보기로 했다. 걸어도 걸어도 산장은 안 보였다. 이쪽이 아니었나? 반대쪽으로 가볼까? 급한 마음에 뛰었다. 헉, 절벽이다! 조금만 더 빨리 뛰었다면 속력을 조절하지 못해 아래로 떨어졌지도 모를 아찔한 순간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길을 잃은 적은 많았어도 목숨이 위태로운 적은 없었다. 눈앞에 길이 사라지고 없었다. 주위에는 하늘과 공기와 바람, 나무와 돌멩이밖에 없었다. 얼떨떨했다. 다시 돌아서서 걸었다. 산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무감각해졌다. 머릿속이 백지가 되는 것 같았다.
그때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 에두아르였다. 그의 전화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어디야? 열두 시 약속 까먹었어?”
“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 분명한 건 내가 호텔 정원에서 보이는 건너편 산에 있다는 거야.”
“으하하하하! 네가 드디어 제대로 길을 잃었구나!”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냐? 하지만 그의 웃음 덕분에 내가 처한 상황이 덜 심각하게 느껴졌다. 에두아르는 주위에 나무가 없는 곳을 찾아 겉옷을 벗어 흔들라고 했다. 자신이 망원경으로 나를 찾아내겠다는 것이었다. 아주 여유만만했다.
“자, 십 분 후부터 옷을 흔들어. 삼십 분 동안 흔들어. 물론 그 전에 내가 널 찾아낼 수도 있어. ”
우선 나무가 없는 곳을 찾아야 했다. 정신없이 걷다가 비탈진 곳에 바위만 있는 곳을 발견했다. 그곳까지 가는 길이 없어 장갑을 끼고 바위 사이 잡풀을 잡고 엉덩이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그가 시킨 대로 겉옷을 벗어 흔들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흔들었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옷 제대로 흔들고 있어? 아무리 봐도 니가 안 보여. ”
“나 지금 커다란 바위 위에서 옷을 계속 흔들고 있어. 나, 안 보여? 악!”
바로 눈앞에서 엄청 큰 뿔이 달린 산짐승이 나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왜? 왜 그래?”
“야생동물이닷! 아아악!”
괴성이 끔찍했는지 나를 향해 달려오던 산짐승이 더 놀란 것 같았다.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또다시 에두아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상황 파악이 안되는 건가? 왜 웃고 지랄인가?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야! 재밌냐?”
“걱정하지 마! 바로 구조대에 연락해서 헬리콥터 띄울게! 그냥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헬리콥터? 내가 고소공포증이 심하다는 걸 잊었나?
“헬기는 안 돼! 절대로! 네버!”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에두아르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배터리가 방전돼 휴대전화가 꺼진 것이었다.
이젠 어쩔 수 없다. 스스로 길을 찾는 수밖에. 무조건 걸어야 했다. 정신없이 걷고 있는데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다. 내 말을 똥구멍으로 들었나? 고소공포증이 장난인 줄 아나? 나는 얼른 나무 아래 몸을 숨기고 헬기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헬리콥터가 사라진 후 다시 뛰다시피 마구 걸었다.
산속은 조용했다. 나는 혼자였다. 그렇게 완벽하게 혼자가 되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알피니스트 조 심슨이 쓴 《난, 꼭 살아 돌아간다》라는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마음속에 은밀하게 숨어 있던 공포도 조금씩 사라져갔다. 나는 내가 죽는 데 과연 얼마나 걸릴까 궁금해하며 내 감정이 변해가는 것을 흥미롭고 느긋한 마음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중략) 일찍이 이렇게 나른한, 마치 팔과 다리가 잘려나간 것 같은 기분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멀리서 인기척이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뛰었다. 셰퍼드 두 마리와 걷고있던 남자 두 명이 나를 보자 소리쳤다.
“마담 리?”
에두아르가 수색대를 보낸 것이었다.
“Yes, Yes! I am!”
소리치며 달려가는 나를 향해 남자들이 박수를 쳤다.
“혼자 길을 찾으셨군요. 잘하셨습니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남편분이 이 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걱정 많이 하고 계시니 어서 뛰어가세요! 저희는 남편분께 연락드리고 천천히 뒤따르겠습니다.”
헉, 그놈이 내가 지 마누라라고 하던가요? 나는 경악하면서도 따져 물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단 뛰었다. 멀리서 두 남자가 보였다. 에두아르와 장 프랑수아였다. 나는 걸음을 늦춰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두 남자를 마주하자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라 그저 웃음만 나왔다. 장 프랑수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괜찮냐고 물었다. 에두아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브라바! 난 네가 분명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어”.
그르노블로 돌아가는 길 에두아르는 옆자리에 장 프랑수아를 앉혔다. 내게는 피곤할 테니 뒷자리에 누워서 가라고 했다.
장 프랑수아가 계속해서 스키 얘길 하는데 에두아르가 그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쟤 뭐하냐?”
장 프랑수아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잔다. 나는 눈물범벅이 돼서 나타날 줄 알았는데 웃어서 놀랐어. 안 무서웠나봐.”
장 프랑수아의 말에 에두아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서웠을 거야, 아주 많이.”
두 남자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계속 자는 척했다. 예전에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의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보는 버릇 말이오. 자, 젊은 양반, 결정해 버리쇼. 눈 꽉 감고 해버리는 거요.
기분이 이상했다. 조 심슨이 그랬듯이 마치 팔과 다리가 잘려나간 것처럼 나른하고 홀가분했다.
파리로 돌아와 에두아르와 나는 결혼하기로 했다.
* 이 글은 <여행선언문>의 일부 글입니다.
'한국의 빌 브라이슨' 이주영이
'프랑스 책벌레' 라틴어 선생과 함께 한 10년간의 여행,
여행 과로사 직전에 외친 '여행선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