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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영 Apr 13. 2020

2. 항상 용서받는 자

진정 독서는 방해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오늘은 제발 못 좀 박아! 내가 벽에 못을 박을 줄 알았으면 만 년 전에 천만 번도 더 박았을 거다!”

"알았어, 알았어. 10페이지 남았어. 오케이?


정말 열 받는다. 여기서 10페이지란 지금 읽고 있는 책을 10페이지만 더 읽으면 다 읽는다는 말이거나 그만 읽겠다는 소리다. 평소 같으면 10줄 남았을 텐데, 오늘은 10페이지다. 결국 오늘도 못 박을 가능성은 없다는 뜻이다. 

가구를 배치하고 이삿짐의 3분의 2였던 책을 정리하고 난 후, 나머지 잔손이 가는 일들을 남편은 정리하는 법을 모르는 건지 정리할 생각이 없는 건지, 뭐 하나 알아서 하는 법이 없다. 거실 바닥에 액자들이 널브러져 있다. 몇 날 며칠 동안 못을 박아 주면 벽에 거는 일은 내가 할 거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그는 알았다고만 할 뿐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못을 박지 않는 이유는 많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이웃에게 방해가 된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이웃에게 방해가 된다’

‘식사시간이라 이웃에게 방해가 된다’


남은 10줄이나 10페이지를 읽고 나면 매번 시간이 애매한 것이다. 이쯤 되면 ‘친절한 이웃상賞’이라도 수여해야 할 판이다. 어쩌다 못 박을 시간대가 맞으면 이번엔 “너무 피곤해서 내일 하겠다”라고 한다. 만약 프랑스인이 한국인처럼 일을 했다면 모조리 과로사했거나 울화병으로 미쳤거나 난동을 일으켜 도시를 엉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시간대도 맞고 피곤하지도 않을 때면, 이번엔 “적당한 못이 없어서 일단 못부터 사 와야 하는데, 못 파는 가게가 너무 멀다. 다음에 지나는 길에 못을 사 와서 박겠다”라고 한다.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남편은 오늘도 분명 못을 박지 않을 것이다. 정말이지 있는 힘을 다해 폭력을 행사하고 싶다.


"너무 이른 시간이야" "너무 늦은 시간이야" "너무 피곤해"


엄마한테 전화해서 하소연이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다. 책을 읽느라 며칠째 못을 안 박았고, 지금도 남은 10페이지를 읽느라 못을 안 박고 있는 남편이 미워 죽겠다고 했다. 


"에두아르가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노름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는다고 미워하다니…. 책은 안 읽어서 탈이지, 책을 읽는다고 어떻게 화를 낼 수가 있니? 안 그러냐?”


엄마는 30분 동안 못을 안 박는지 못 박는지 알 수 없는 남자와 사는 딸내미의 하소연을 들으며 맞장구를 쳤음에도 그가 책을 읽느라 못을 안 박는다는 이유로, 어처구니없게도 남편을 쉽게 용서해 버린다. 엄마와 통화한 뒤 더 스트레스를 받은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로마에 사는 동생에게 전화해서 남편 욕을 해댔다.  


"낮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TV를 보는 것도 아니고,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는 거니까, 뭐라 하지도 못하고…. 속상하겠다.” 


동생은 엄마처럼 ‘바람피우고, 노름하고 술 퍼마시고 다닌다’는 극단적인 예는 들지 않았지만 그가 책을 읽고 있다는 이유로 당장 못을 못 박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기는 건 마찬가지다. 진정 독서는 방해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책벌레 남편과 살면서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이다. 

친정 식구들과 통화하면서 더 열받아 있는데 마침 친구 영은이 안부 카톡을 날린다. ‘앗싸!’

“다 좋은데, 집에 못을 못 박아서 열받아 있다”라고 톡을 보냈다. 영은은 내 황당한 메시지에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번엔 말이 아닌 문자로 남편 욕을 마구 날렸다.


“주영아, 예전에 어떤 소설에서 집에 책을 놔둘 공간이 부족해서 처자식을 죽인 남자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 너무 열 받지 말고, 무엇보다 조심해! ㅋㅋㅋ”  


이것은 무엇인가? 나의 목숨을 걱정해 주는 친구가 고맙긴 하지만 왠지 옆에 있었으면 주먹을 날렸을 것 같다. 책을 놔둘 공간이 없어서 처자식을 죽였다고? 대체 누가 그런 황당한 소설을 쓴 거야? 바로 검색 들어간다. 누쿠이 도쿠로(貫井徳郎)의 《미소 짓는 사람(微笑む人)》     

책이 늘어나 집이 좁아졌다는 이유로 아내와 딸을 죽인 남자를 소설가인 ‘내’가 남자의 과거를 추적해 나가는 과정을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쓴 미스터리 소설이다. 상당히 많은 블로거들이 이 책에 대해 거론하고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해한 척하며 살고 있다. 자신들이 이해한 척한다는 사실조차 보통은 잊고 있다. 안심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바로 불안해지니까.”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나는 주인공의 납득하기 어려운 살인 동기보다 작가가 왜 하필 ‘책을 놓을 공간이 부족해서’라는 점을 살인 동기로 설정했을까에 관심이 간다. 작가는 단어 하나, 조사 하나도 신중하게 생각하고 고른다. 하물며 이야기의 가장 큰 모티브가 되는 것을 대충 설정할 리는 없다. 작가는 메시지를 더 강하고 선명하게 전하기 위해 ‘어떤 살인 동기여야 사람들이 납득하기 힘들까?’ 고민했을 것이다.

‘책’은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물이다. 그리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을 우리는 안전한 존재라고 믿는다. 지하철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과 책을 읽고 있는 사람 중 당신이라면 누구 옆에 앉겠는가? 나는 책을 읽고 있는 사람 옆에 앉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그쪽이 더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사람에 대해 암묵적인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안전하다고 신뢰하는 인물이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납득이 잘 되지 않는 일이다. 실제로 독자들은 남자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납득이 되지 않아 어안이 벙벙하다. 바로 작가가 전하려 했다는 메시지, ‘타인에 대한 이해의 불가능성’을 전하기에 ‘책벌레’는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 선택을 하기까지 작가가 했을 고민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책 읽는 에두아르. 진정 독서는 방해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책벌레 남편과 살면서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이다.

                  



복도 너머 남편의 서재에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남편은 책 속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할 때면 반드시 소리 내어 읽는 괴상한 습관이 있다. 가끔 고전 그리스어 문장을 큰소리로 읽을 때면 미친 마법사가 주문을 외는 것 같아 섬뜩할 때도 있다.

      

"기가 막혀서! 저는 그가 하루에 열 시간 넘게 앉아서 작업을 하다가 지쳐서 정신을 잃는 걸 본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 전부를 걸고 작품에 열중하다가 거기에 미쳐 스스로 목숨까지 끊은 남자를 어떻게 게으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게다가 무식하다니,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디 있어요! 저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사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영광을 가지려면 그전에 이미 수용된 지식으로부터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거든요.”

- 에밀 졸라(Emile Zola), 《작품(L’Œuvre)》 귄유현 번역, 을유문화사      


얼씨구! 오늘은 문장에 감동하셔서 소리 내어 읽는 게 아니다. 분명 나 들으라고 읽는 거다. “못 박아라!” 잔소리나 하면서 소파에 누워 여기저기 전화만 하지 말고, 《작품》에 등장하는 화가 클로드처럼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려보면 어떻겠냐는 소리인 게다. '정말 내가 인간성이 좋아서 저 뺀질이와 살아 주는 거다!' 싶으면서도, 남편이 독서가 아닌 게임이나 하면서 못도 안 박고 잔소리를 했다면, 폴 세잔이 소설 《작품》을 읽고 그의 절친 에밀 졸라에게 했던 것처럼, 연(緣)을 싹둑 끊었을지 모른다.

아, 결국 나도 남편을 용서하는 것인가? 용서받고 싶다면,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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