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주영 Apr 27. 2020

4. 착한데 동네 쌈닭인 남편의
1도 없는 융통성(上)

쪽팔려서 못 들어가는 동네 가게만 벌써 두 군데.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룩주룩 흐른다. 이 더운 날, 반창고 하나 사려고 언덕길을 15분째 오르고 있다.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약국이 있지만,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부터 집에서 가까운 약국은 가지 않는다. 건강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걸으려는 것도, 언덕길에 있는 약국의 반창고가 더 저렴해서도 아니다. 우리 동네에는 아시아 사람이 거의 없다. 내 튀는 외모 덕분에 동네 사람들은 나를 쉽게 기억한다. 약국 여자도 분명히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약국 여자에게 나는 ‘멍멍이 지랄꾼’의 가엾은 마누라다.      


이탈리아에서 친구 마띠아가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다. 프랑스에 처음 와 본 마띠아는 이것저것 마구 먹고 돌아다니더니 결국 배탈이 나고 말았다. 내가 약국 옆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있으면 두 남자는 약을 사서 바로 슈퍼로 오기로 했다.

천천히 장을 봤다. 두 남자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슈퍼에서 나와 약국 안을 들여 봤다. 남편은 얼굴을 벌겋게 해서 뭐라고 떠들고 있고 마띠아는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다.

사정은 이랬다. 남편은 약사에게 마띠아가 찾는 배탈약을 달라고 했다. 약사는 마띠아가 혹시 프랑스에 여행 온 것이냐고 물었고, 남편은 사흘 전에 이탈리아에서 온 친구라고 답했다. 약사는 여행지 물갈이로 배탈이 났을 때 잘 듣는 약은 따로 있다면서 다른 약을 권했다. 마띠아는 “늘 먹던 약을 먹어도 나을 것 같다”고 했다. 남편은 약사에게 마띠아의 말을 전했지만, 약사는 자기가 권하는 약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우겼다. 이때까지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상황을 파악한 마띠아는 “그럼 약사가 권하는 약을 사겠다”며 가격을 물었다. 

약값이 문제였다. 약사가 권한 약은 마띠아가 먹던 약보다 3배나 더 비쌌다. 남편은 늘 그렇듯 머릿속의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했다. 마띠아에 의하면, 남편이 “이 약이 비싸서 권한 건가?”를 따진 것 같다고 한다. 약사는 당연히 반박했을 거고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내가 약국에 들어갔을 때 남편은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당신은 프랑스가 아직도 관광대국이라고 생각하는가? 지난 2월 <르 피가로>의 보도에 의하면 올해 들어 130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줄었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테러와 넘쳐나는 소매치기 때문이다.” 


뒷말은 안 들어도 뻔하다. ‘이젠 약사도 외국인 관광객한테 바가지를 씌우니, 머지않아 프랑스를 찾는 외국 관광객은 한 명도 없을 것이며 프랑스 관광산업의 미래는 없다.’ 이런 소리가 나오기 전에, 내가 나서야 했다. 나는 약사에게 마띠아가 원했던 약을 달라고 하고 남편을 끌고 나왔다. 분이 덜 풀린 남편은 약국을 나오면서도 씩씩거리며 말했다.


"저 여자가 마띠아한테 12유로나 되는 약을 팔려고 했다고! 마띠아한테 말이야!”


당시 마띠아는 취업 준비생이었다. 마띠아의 경제 사정을 알고 있어 더 화가 났던 모양이다. 그 마음이 갸륵하든 기특하든 어쨌든 간에, 나는 그날 이후 집에서 가까운 약국 근처는 쪽팔려서 얼씬도 하지 못한다.   


약국 여자에게 나는 이 ‘멍멍이 지랄꾼’의 가엾은 마누라다.


내가 쪽팔려서 못 가는 곳은 집에서 가까운 약국만이 아니다. 집에서 가까운 정육점도 못 간다. 남편이 그곳에서도 ‘한판 떴다’.

양고기를 먹지 않는 내게 정육점 주인이 자꾸 먹어보라고 권한 게 싸움의 발단이었다. 나는 양고기를 안 먹는 것이 아니라 비위에 안 맞아 못 먹는 것이라고 했고, 정육점 주인은 그렇다면 어린 양고기를 먹어보라고 권했다. 나는 어린 양고기는 왠지 죄책감이 느껴져 먹고 싶지 않다고 했고, 정육점 주인은 한번 먹어보면 생각이 바뀔 거라며 어린 양고기를 또 권했다. 나는 정육점 주인이 진심으로 맛난 음식을 나도 맛보길 바랐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의 생각은 달랐다. 고기를 더 팔아먹으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남편이 ‘상도덕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자 정육점 주인은 이내 빈정이 상했다. 곧이어 싸움이 시작되었다. 손님에게 억지로 물건을 사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어떻게 하다 보니 ‘동물학대와 채식주의자’에 대한 이야기로 번졌다. 늘 그렇듯 남편은 신문이나 잡지의 기획기사, 관련 서적의 일부를 인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상태로 조금만 더 놔두면 ‘지구의 환경문제’가 거론될 판이었고 싸움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이 될 것이었다. 남편을 힘으로 끌고 나와야 했다. 정육점 주인에게 나는 ‘재수 없는 꼰대’와 사는 불쌍한 여자다.       




남편이 동네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면서 악다구니를 쓴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대쪽 같은 성품의 내 남편 에두아르님은 어찌나 정의로우신지 작은 불의도 참지 못하신다. 그리고 뒷일 따위 생각지 아니하시고 일단 덤비고 보신다. 아무래도 고등학교 선생보다는 ‘고발 전문 탐사기자’를 했어야 했다. 


예를 들어,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나이 많은 어르신이 줄을 서고 있으면, 앞에 서 있는 사람한테 순서를 양보하라고 권한다. 순순히 양보해 준 사람은 남편에게 극찬을 받으며 친구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엄청 듣기 싫은 설교를 들어야 한다. 동네 기차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발견하면 당연히 그곳이 금연구역임을 지적하며 설교에 들어간다. 그리고, 거의 매번 싸움이 벌어진다. 


남편이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남편 말이 맞기 때문이다. 노약자는 보호해야 하며, 금연구역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한다. 지하철 의자에 신발을 신은 채 발을 올리는 것은 매너가 아니며, 미술관에서 전시품을 만지는 것은 해서는 안 될 행동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적을 받으면 그 행동을 멈춘다. 그렇게 일은 마무리된다.

그런데, 남편이 지적을 하면 왜 매번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 5화에서 '남편에게 훈수 두려고 작전을 짠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결혼은 미친 짓이 아니다. 단지 내가 미친놈과 결혼했을 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