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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영 May 04. 2020

5. 착한데 동네 쌈닭인 남편의
1도 없는 융통성(下)

생활과 밀착된 지혜는 책이 아니라 관계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닐까?

아무리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솔직히 말해야겠다. 

그건 어디까지나 남편의 ‘주먹을 울리는 말투’ 탓이다.


영화관에서 뒤에 앉은 사람이 내 머리 때문에 자막 읽기가 힘들다고 하면, 못 들은 척 무시하거나 ‘나도 어쩔 방법이 없다’고 하면 된다. 남편은 “내 대갈통을 잘라 버릴까요?”라고 깐족댄다.

지하철에서 휴대전화로 크게 통화를 하는 사람에게는 그냥, ‘조용히 해주세요’ 부탁하면 된다. 남편은 “나는 당신의 사생활이 전혀 궁금하지 않아요”라고 간접화법으로 말을 꺼낸다. 이 때문에 시비가 붙는다.

미술관에서 전시품을 만지는 사람에게는 ‘만지지 마세요’ 한마디면 된다. 남편은 그 한마디에 사설을 붙인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오늘날 이 작품을 볼 수 있는 것은 천 년 동안 아무도 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로 시작하는 대부분의 문장은 사람을 몹시 불쾌하게 만든다.

일부러 상대를 기분 나쁘게 만들려고 그러는 것 같지는 않지만 남편의 이런 언어습관은 사람의 비위를 상하게 만드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입만 열면 투덜대는 프랑스인들이 기분 나쁜 말투의 설교를 듣고만 있을 리 없다. 당연히 말싸움으로 이어진다. 싸움이 벌어지면 남편은 상대가 하는 말 하나하나에 꼬투리를 달며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이때 반어문과 인용문,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며 뜬금없이 도덕 교과서적인 라 퐁텐(Jean de La Fontaine)의 풍자시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명언을 읊어댄다. 상대의 말에서 문법적 오류가 있기라도 하면 프랑스어 문법 강의를 시작해 분위기를 더 악화시킨다. 옆에서 보고 있자면, ‘저러다 얻어맞지’ 싶을 정도다. 


무엇보다 남편의 이런 말투는 싸움을 지루한 장기전으로 몰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어느 순간부터 싸움의 원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주제로 싸우게 되는 것이다. 남편의 말싸움은 항상 서로 다른 주제로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진행된다.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운 것으로 시작된 말싸움은 어느 순간부터 교육정책에 대한 상반된 의견의 싸움으로 뒤바뀐다. 

‘당신의 행동은 이러이러한 것이 잘못되었으며, 당신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적으로 곤란한 일이 벌어지는데, 예를 들어 몇 년도에 어떠한 사건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으며, 고대 철학자 누구누구는 이러이러한 말을 했는데 어쩌구저쩌구’ 하는 식의 논리적 말투는 글을 쓰거나 논쟁을 벌일 때나 써먹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과 말싸움을 할 때는 아무짝에도 필요 없다. 남편은 사소한 말싸움에서 비유나 인용문을 사용해 논리적으로 충고하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모르는 것 같다. 모자라도 많이 모자라는 헛똑똑이가 아닌가. 


참, 답답한 노릇이다.

에두아르는 착한 사람이다. 내 남편이라 하는 소리가 아니다. 에두아르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얼마나 선하고 좋은 사람인지 안다. 나는 남편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적어도 ‘밉상 또라이’로 인식되지 않았으면 한다. 남편에게는 처세술이라는 것이 심각하게 부족하다. 처세술의 기본인 융통성은 1도 없다.


헛똑똑이긴 하지만 착한 에두아르. 나는 남편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남편을 도와줄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다 그에게 먹힐 만한 방법이 떠올랐다.

남편의 방식을 벤치마킹한다. 책 속 문장을 적극 인용하는 것이다.

남편이 지하철에서 또 한 판 말싸움을 하고 돌아온 날, 나는 작전을 개시했다.     


비판이란 피곤한 것이다. 왜냐면 비판은 인간을 방어적 입장에서 자신을 정당화하도록 안간힘을 쓰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한 인간의 소중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그의 자존심에 입힌 손상이 원한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짓이다. 

-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하소연 번역, 자화상) 중에서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만 달랑 써서 남편에게 메일을 보내며 제법 똑똑한 방법이라는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바로 답메일이 도착했다.      


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당신이 만약 촛불을 켜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 어두움을 어떻게 밝힐 수 있는가?

- 나짐 히크메트, <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 무슨 때아닌 투쟁정신이란 말인가?

남편은 일제강점기나 80년대 군사 정권하의 한국에서 살았어야 할 사람이다. 아니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해도 68년 5월 혁명 때 네 살만 아니었어도  좋았을 사람이다. 나는 투쟁정신에 불타는 쌈닭이 여기저기서 벌이는 싸움질을 남은 평생 보고 살아야 하는 걸까?       




땀을 뻘뻘 흘리며 약국을 향해 언덕을 오르고 있는데, 남편한테 전화가 왔다.

내가 반창고 하나를 사기 위해 뙤약볕 밑을 걷고 있다고 하자, 남편이 약국으로 차를 가지고 오겠다고 한다. 약국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이미 약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내가 반창고를 골라 들자, 남편은 약국에서 팔고 있는 화장품을 보면서 필요한 거 없냐고 묻는다. 내가 화장품을 둘러보는 사이 남편은 약사에게 약국 화장품과 화장품 가게 화장품의 차이를 살갑게 물으며 대화의 꽃을 피운다.


약국을 나와서는 내 손가락에 상처가 났으니 저녁은 자기가 하겠단다. 남편이 요리를 하겠다고 할 때의 메뉴는 대부분 비슷하다. 스테이크와 샐러드 그리고 와인. 남편은 건너편 정육점으로 발길을 옮긴다. 스테이크용 안심을 주문하고 더 필요한 것이 없나 가게 안을 둘러보며 주인과 잡담을 한다. 남편은 고기의 부위별 요리법이나 원산지에 대해 묻고 주인은 알고 있는 지식을 쏟아낸다. 남편은 주인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진정한 프로라니 뭐라니’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싸우지 않고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니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언덕길 약국의 약사와 정육점 주인에게 살갑게 구는 남편이 왠지 찌질하게 느껴진다. 그들과도 싸우면 약이나 고기를 사기 위해 옆 동네까지 가야 한다는 것을 남편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찌질하든 어쨌든 책벌레 쌈닭에게도 나름대로의 융통성은 있었다.

생활과 밀착된 지혜는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활 속에서 맺는 관계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생계형 융통성을 헛똑똑이 책벌레는 ‘싸움, 투쟁’이라는 방식으로 배운 것일지도 모른다. 살면서 겪는 모든 일들은 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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