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에스더 Feb 18. 2024

저는 드라마를 번역합니다.

드라마 번역가가 뭔데?


띠리링- 휴대폰 문자 수신음이 울린다.


"작가님, 지난번 드라마 시즌 2가 기획됐어요. 이번 작업도 참여 가능하신지 여쭤봅니다. 총 10부작이고 지난 시즌처럼 전부 60분물, 요율은 같습니다. 마감은 명절 뒤로 맞춰드릴게요."



<1. 드라마 번역합니다.>


나는 올해 9년 차 드라마 번역가다. 직접 타이틀을 말하려니 영 껄끄럽지만 그게 사람들이 일컫는 내 직업이다. 어쭙잖은 기술 번역과 통역 경력을 더하면 영어로 밥을 벌어먹은 지 10년이 넘었다. 드라마 번역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짧게 소개하자면 국내 업체에서 외화를 수입해 번역가에게 의뢰하고, 대본과 영상을 받은 번역가가 빠르게 번역본을 제공하는 시스템이다. 케이블 채널 및 OTT에 나가는 드라마 및 영화를 번역한다. 그렇다. 나는 숱한 직장인이 부러워하는 프리랜서이자 그 이름도 낯간지러운 디지털 노마드다.


지금은 태국 사멧이라는 섬의 한적한 바닷가 식당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결국 이렇게 시간과 장소에 제약받지 않는다는 사실로 많은 사람이 프리랜서를 부러워한다. 하지만 누군가 내 직업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 달라 하면 이리 말하겠다.


변방의 무명 번역가.

생존형 디지털 노마드.

언제 밥줄 끊길지 몰라 물 들어올 때 천 번 노 젓는 사람.

낮밤 자주 바뀌는 올빼미.

새벽 3시에도 일하는 사람.

의지할 동료 없는 외톨이.

4대 보험, 연차, 퇴직금 없는 영세민.

거북목 환자.

나라는 사람의 사장이자 종업원.



<2. 덕업 일치의 삶을 산다는 것.>


모두가 핑클 노래 따라 부를 때 브리트니 스피어스 노래를 받아 적던 초등학생. 영어 시험공부 대신 오프라 윈프리 쇼를 보던 중학생. 삼순이 대신 프렌즈를 보던 고등학생은 결국 드라마 번역가로 성장했다. 이 직업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가장 좋아한 미국 드라마인 CSI 시리즈도 번역했고 가장 즐겨 보던 TV 채널에는 수시로 내가 번역한 드라마가 나오며, 심심할 때는 온갖 OTT에서 내가 번역한 드라마를 골라 볼 수도 있다. 방영 전 미공개 드라마를 어느 시청자보다 먼저 본다는 것도 짜릿한 일이다.



하지만 비대면 시대와 맞물린 OTT의 폭발적인 인기로 "영상 번역가"라는 내 직업이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올랐고 외화를 보며 어색한 번역에 불만을 표출하던 이들이 '저 정도면 나도 번역하겠다'라는 자신감으로 이 업계에 도전장을 들이미는 중이다.



그러나 드라마 번역은 보이는 것만큼 쉽지 않은 일이고 매일평가받아야 하는 운명이자 맞춤법과 씨름하느라 머리를 쥐어뜯어야 하는, 세계 문화 및 언어 이해는 물론이요, 국립 국어원 수준의 국어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고된 정신노동이다.


어떻게 보면 낯설고 어떻게 보면 한없이 평범한 드라마 번역이라는 일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키보드를 두드리기로 마음먹었다. 프리랜서를 대접해주지 않는 나라에서 그 이름도 낯선 드라마 번역가로 먹고살기가 어떤 모습인지 공유하고, 어느 한 곳 허심탄회하게 속 얘기 할 수 없어 슬픈 수많은 동지들과 소통하며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면 참 좋겠다.


또한 우리의 "작품"을 감상할 대중에게 우리 일을 알리며 지독한 비아냥 대신 따뜻한 관심을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고, 이런 행동이 모이고 모여 한국 번역가의 처우가 개선되면 좋겠다는 게 큰 바람이다. 


영상/드라마 번역가라는 직업에 관심이 있거나 프리랜서로 일할 마음이 꿈틀대는 분들에게 리얼한 경험담을 들려드리는 '매거진'이 되길 소망한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노동자와 프리랜서, 번역가의 건투를 빌며.



뜨거운 태양이 쏟아지는 태국 사멧섬에서,

에스더 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