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파크의 오카리나 부는 여인
재미있는 실험을 하나 해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귀중한 시간을 흥미 없는 것에 쓰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든, 도움이 되든, 관심이 없으면 지속하는 것은 고통이 된다. 그래서 나는, 흥미에 집중하기로 했다.
앞으로 내 인생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보따리 풀 듯 하나하나 풀어볼 것이다. 과연, 23살, 아직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나의 삶을 누군가 흥미롭게 여겨줄 것인가, 하는 게 이번 실험의 주제다. 우선 나는 내 인생이 ‘되게’ 재밌다. 그것도 엄청, 매 순간을 기록해서 남들과 공유하고 싶을 만큼. 도무지 싸이의 ‘어땠을까’ 같은 인생을 살아낼 자신이 없기에, 이렇게 이곳에 기록하기 시작한다. 이 실험의 끝에 이를 때쯤엔 “훌륭한 결과야! 결국 해냈군!” 하며 너털웃음 짓는 흰 수염의 과학자가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유레카!” 하며 벗은 몸으로 뛰어갈 수 있으면 더 좋으련만, 나에게 그 정도의 깡은 없음을 알고 있으니. 지금까지가 서론, 리서치 페이퍼로 치면 why you chose this topic 정도, 갈 길이 많이 남았다.
깡이 없다는 말이 나온 김에, 나의 원대한, 그러나 실행하지 못했던 플랜을 하나 세상에 공개해보겠다. 그러니까 나는, 23년의 짧은 인생 중 2년 정도 어쩌다 맨해튼에 있을 기회가 있었다. 그 유명한 뉴욕시티에서 가장 친숙했던 것은 워싱턴 스퀘어 파크, 거대한 아치 모양의 구조물이 있고 겨울마다 아치 구멍 크기와 꼭 맞는 트리가 세워지는 곳이었다. 맨해튼엔 여러 공원들이 있고, 큰 공원들 마다 각자의 분위기를 뽐낸다고 생각했었다. 유니온 스퀘어 파크는 우리네 강남역처럼 각자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 거쳐 가는 부산스러운 장소였고, 매디슨 스퀘어 파크는 파크라고 하기엔 너무 세모난, 마음 놓고 주저앉아 시간을 보내기에는 나 스스로가 너무 백수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브라이언트 파크는 내가 항상 너무나 속하고 싶은 분위기의 그것을 풍겼으며, 센트럴 파크는 내 삶 안의 모든 것이 완벽해질 것만 같은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와중 가장 낮은 곳의 워싱턴 스퀘어 파크는 아티스트들의 모임터였다.
술과 마약에 취한 사람들만큼 낭만에 취한 사람들이 가득했던 그곳은 그림을 파는 사람들, 도저히 어디 쓸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소품들을 매대 가득 채워 놓은 사람들, 낮이고 밤이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젊은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끔 찾아와 인생은 왜 가치 없는지 설명할 수 있다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앉아 있는 사람들과 미국은 망했고, 이 세계도 망했다며 의자 위에 올라서서 연설하고 있는 사람들도 이 공원을 완성하는 색다른 요소이다. 누가 봐도 쓸데없는 어떤 것들을 치열하게 해내고 있는 사람들처럼 멋있어 보이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 가장 솔직하게 내면 가장 깊숙한 순수를 드러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두 눈으로 마주하는 경험은 결코 접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나도 이곳의 일원이 되고 싶어 벤치인 척하는 커다란 돌 위에서 다리를 꼬고 누워 유지혜 작가의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를 완독하기도 했다
- 나는 오전 두 번째 수업 시간이었다는 점과 추운 바람이 부는 날씨였다는 환경적 요소를 포함하여 이 시도에 큰 점수를 매겼다. 그러나 뉴욕에서 워싱턴 스퀘어 파크라는 곳을 알고, 어떤 곳인지 느끼고 난 후 가장 먼저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저 아티스트들 사이에서 냅다 오카리나를 불어보는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그러니까 12살이었을 때 플룻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쁘고 뭔가 있어 보였던 은색 플룻은 침만 흥건히 묻은 막대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신 오카리나는 어떠냐며 제안해주셨던 선생님과 그 후로도 삼 년은 더 함께하며 얼렁뚱땅 교사자격증까지 따고 말았다. 그것이 참, 동고동락했던 오카리나한테는 미안하지만, 평소에 우리가 접하는 것은 관광지에서 파는 새 모양의 오카리나 정도로, 그다지 멋이 있는 악기는 아니다. 그래도 타고난 빠른 손놀림 덕에 관이 두 개 붙어있는 더블 오카리나까지 마스터하는 경지에 올랐다 - 트리플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게까지 최선을 다하지는 말자는 마음에 시도하지 않았다. 하여튼, 그렇게 내가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악기가 되어버린 오카리나를 뉴욕시티 그리니치빌리지 중앙의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냅다 불어버린다 한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줄 것 같지 않았다. 그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저 저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 누가 지켜보든 말든 내가 할 줄 아는 걸 해본다는 것이. 날씨가 좀 더 따스워지면 해야지, 꽃이 피면 해야지, 사람들이 조금 더 관대해질 여름날에 해봐야지, 할 일을 마치고 작별 인사로 해 보아야지, 계속 미루다가 그사이 아는 사람들이 많아져 버린 나는 스스로 그 플랜을 취하했다. 웃기는 일이다, 그 대단한 뉴욕에서 나 한 명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 버린 것 아닐까 하며 쫄려서 관두었다는 게. 변명하자면, 원래 조금씩 아는 사람들 앞에서 삐끗하는 것이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계단 구르는 것보다 부끄러운 법이다. 그러나 나는 요즘도 그 중앙 분수 주변에서 모른 척 여유롭게 내가 가장 연주하기 좋아했던 노래를 오카리나로 불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그럴 때마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모자는 혹시라도 놔두지 말아야지, 돈을 받아버리면 어떡해, 하는 생각까지 하며. 그렇게 나는 또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