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딸 넷 중 막내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던 날 9살 터울의 큰언니와 6살 터울의 둘째 언니는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 시절엔 병원도 흔치 않아서 산파를 불러 애를 낳았다고 한다. 우리 엄마는 첫 유산을 하고 딸 넷을 낳은 후 마지막 유산까지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애를 줄줄이 사탕으로 낳은 건 아닐 것이다. 그놈의 아들이 뭔지 아들 한번 낳아보겠다고 아빠와 사랑을 나눈 결과물이 바로 우리 네 자매다. 살아오면서 나의 태몽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가족 중 누군가는 꿔주기는 한 것인지조차도 알 수가 없다. 그 대신 부모 이외에 내가 태어나던 날을 두 명의 자매가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이야기를 해 준다는 것이 태몽 이상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며 위안으로 삼고 살았다. 내가 태어나던 날 마당 공동 펌프로 물을 받아 물을 끓여 대던 상황과 몇 시간이 경과 후 아기의 울음소리가 났다고 했고, 큰언니는 학교를 다녀오니 내가 태어나 있었다고 했다. 그녀들이 새로운 동생을 맞이한 느낌이 어땠을지 그때 느꼈던 감정까지 이야기를 해 주면 좋으련만 그것까지 바라는 것은 내 욕심이란 생각에 마음을 비웠다.
어릴 적 정도 없는 외할머니 시골집에 가면 외할머니는 나를 “언년아”라고 불렀다. 버젓이 이름이 있는데 왜 나를 그렇게 부르는지 불편한 마음이 들곤 했다. 혹시 손주들이 너무 많아서 이름을 다 기억 못 하는 것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려 해도 다른 사촌들이나 언니들의 이름은 모두 제대로 불러주었기 때문에 내 이름만 기억을 못 한 건 확실한 것 같았다. 시골집에서 외로이 지내시느냐고 말이 그리우셨던 할머니의 끝없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은 유일하게 나였던 것 같다. 다른 형제들이 할머니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았던 이유는 할머니의 레퍼토리는 투시하나 틀리지 않을 정도로 늘 같았고 약주를 드시지도 치매가 있으신 것도 아닌데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를 하니 어느 누구도 그 장단에 맞춰 이야기를 듣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걸리는 사람은 할머니의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말을 끊고 도망가기가 바빴다. 그런데 여러 레퍼토리 중 신기하게도 나의 이야기가 있다. 내가 태어났을 때 하얀 백지장 같이 태어났다고 한다. 울음소리도 워낙 약해서 살기나 하려나 하는 마음으로 이불에 돌돌 말아 윗목에 밀어두었는데 캑캑하는 소리를 내가 울었다고 했다. 그랬던 것이 이렇게 큰 거라며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이름을 부르지 않고 “언년이”라고 불러야 오래 산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억지로 지어낸 이야기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신뢰성이 좀 떨어지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내가 7살쯤 팔이 부러진 적이 있다. 병원에서 제대로 뼈를 맞추지 않고 깁스를 해서 팔이 휘었다. 휘어진 팔을 볼 때마다 엄마는 한숨을 쉬며 했던 이야기는 어디 가서 점을 보았는데 내가 10살 안에 병신이 되지 않으면 죽는다고 했단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차라리 팔이 부러져 휘어진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휘어진 팔은 성장이 끝나고 성인이 된 후 신경이 뼈 사이에 눌려 새끼손가락과 약지 손가락 마비가 와서 완전히 구부러져 버릴 지경까지 오는 바람에 8년 전 수술을 했다. 외할머니와 엄마가 말한 나의 일화가 사실이라면 내가 생사를 오가는 삶 속에서 마흔이 넘는 나이까지 무사히 살 수 있었던 것은 내 팔의 골절 사고로 나의 생사가 바뀌게 되어 이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으며 잘 이겨내며 살고 있게 된 것이다. 사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가족 중 누군가가 꿔준 불확실한 태몽보다는 큰언니와 둘째 언니가 기억하고 있는 내 생의 첫날과 신뢰성이 없는 다이나믹한 나의 일화가 더 재미있긴 한 것 같다. 이렇게 나와 세상은 연결이 되어 첫째의 태몽은 남편이 꾸었기에 나는 첫째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태몽을 꾸었고 아이들에게 적어도 억지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신뢰성 있는 태몽을 들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