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아라를 데려왔을 때 맞닥뜨리게 된 가장 큰 난관은 다른 무엇도 아닌 고유한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으로 눈앞의 고양이를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물을 좋아하고 고양이를 반려하기로 결심한 것과는 별개로 특정한 이름으로 동물을 부른다는 행위 자체가 굉장히 낯간지럽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주변에서 강아지나 고양이를 반려하는 지인들이 대화 속에서 “우리 ○○는~”하며 언급할 때는 한 번도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야옹이’라고 부를 생각이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봐도 아라에게 면목 없는 예비 이름이다.) 눈앞의 저 고양이는 야옹하고 울 테니까 적절한 이름이라며 자기 합리화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도 당시에 아직 교제 중이던 구 남친이 전화로 그 말을 듣더니 누가 그렇게 반려동물 이름을 성의 없게 짓냐고 기겁을 하며 나를 말렸다. 그리고는 본인의 집에서 반려하는 고양이의 이름과 돌림자로 ‘아라’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구 남친에게 썩 좋은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의 만행을 막고 아라라는 예쁜 이름을 붙여준 것만큼은 지금까지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이름을 정했다고 바로 익숙해지는 건 아니어서 눈앞의 고양이를 ‘아라’라는 특정한 존재라고 인식하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아마 그 시간은 아라가 나를 두렵고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보호자’라고 인식하게 되는 데에 걸린 시간과도 같았을 것이다. 내가 아라를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고양이로 인식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미래를 살아가게 될 운명공동체에 속했다는 것을 완전하게 자각한 순간부터는 자연스럽게 ‘우리’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이 일련의 과정이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서 이름과 존재에 관해 논하는 방식과도 닮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모든 것이 어색했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의 우리는 서로에게 꽃이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