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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작 Jan 12. 2024

2024년에 쓰는 첫 번째 글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님의 글을 읽고 써 내려간 글

 가끔 무엇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대답을 못 하고 난처해하면 먹을 것 중에선 무엇, 책 중에선 무슨 분야의 책 하는 식으로 범위를 좁혀주어야 대답을 겨우 할까말까다.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은데, ‘무엇보다 무엇’이라는 순위를 매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를 아는 바로는 대부분의 대상이나 사람에 대해 수용 범위가 넓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말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다. 그건 ‘은은하다’는 말이다. 나는 ‘은은하다’는 말을 좋아한다. 이 말은 아이러니컬하게 가장 절망적인 근성인 낮은 자신감과 관계가 깊다.


 결핍된 자신감 때문에 갖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것을 말을 할 줄 몰랐다. 누가 물어오기 전에는 내 의견을 먼저 내는 일이 거의 없고 묻는다 해도 대답만 딱 하고 대화를 이어갈 줄 모르는 편이었다. 하도 말을 꺼내지 않으니, 엄마는 걱정이 많으셨었나 보다. 초등 2학년때인가 알림장에 싸인을 해가는 날이 있었는데, 이렇게 글을 남겨놓으신 거였다. 의사표현을 잘하지 않아 걱정입니다. 선생님께서 격려 바랍니다. 라고


 여럿이 모여 있을 때, 나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그 모임이 끝날 때까지 거의 없을 때가 많았다. 대학교 때에는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농담 정도는 가능하게 되었다. 마음이 잘 맞고 편안했었던 것 같다. 가끔 하는 말이 굉장히 웃기다고들 말했다. 그러한 칭찬이 나를 더 말하도록 이끌었을 수도 있다. 어떤 재미있는 말을 해야 할까라고 마음을 먹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는 말처럼 웃기려고 말을 하기 시작하니, 요점이 없고 해 놓고 괜한 말을 했다면서 자책하는 일도 생겼다. 짧은 인사 이후로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던 때와 비교해서는 농담은 큰 발전인 셈이었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말수가 는 것에 대해 괜한 불편함을 갖게 되었다. 재미있지 않아도 되니, 대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관계를 이어나갈 명목으로 필요 이상 툭툭 나와버린 것이다.


 따지고 보면 말수가 많다고 해서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고 유머가 없는 대화라고 해서 대화가 끊기는 것은 아닌데, 말에 대한 자신감이 유난스럽게 낮은 것을 느낀 것은 이십 대 중반이었다. 한 중학교에서 보조교사를 뽑는데, 극강의 긴장을 무릅쓰고 면접을 통과한 적이 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 채, 전적으로 운이 좋았던 것 같았다. 문제는 출근 첫날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걱정이 많았다. 학생들 앞에서 설명하고 가르치는 일을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말실수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하면서, 교문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해서는 안될 행동을 해버렸다. 교감선생님께 거짓말을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절대로 이해 불가한 짓이었고 너무 죄송한 일이었다. 일이 생겨서 근무를 할 수 없다니, 그것도 첫 출근을 기다리고 있었을 학교 선생님들께 큰 민폐를 끼치고 말았다. 엉뚱한 말 한마디로 전화 통화를 끝낸 후, 돌아오는 길에 자신이 얼마나 한심스럽고 창피하고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달변가이거나 수다스럽거나 하는 사람을 만나면 예전에는 저렇게 많이 알고 많이 말하는 사람은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함께 일을 하고 친분이 깊어질수록 대화 속에서 평균 이상의 말수와 꾸밈이 많은 말에서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다. 상대와 나 사이에 쩌렁쩌렁하고 쌩한 분위기의 말투가 불편해졌다. 목소리가 큰 것이나 말수가 많은 것과 무관하게 요란한 말의 상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말의 주인이 나는 아니기를 바랐다. 아이쉐도우로 지나치게 꾸민 눈매, 묘하게 눈길 끄는 진한 립스틱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닮은 듯 하다고나 할까?


 목소리가 크지 않아도 요점이 잘 들리고 말수가 많지 않지만 상대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할 때, 스스로 만족스러운 대화를 했다고 느껴진다. 강렬한 순간보다는 나지막하고 긴 여유가 좋다.  비트가 있는 음악으로에 잠깐의 설렘보다 들릴락 말락한 음이 안국역 어느 지하도에서 울려 퍼질 때, 나는 한 씨디 가게로 이끌렸다. 얼마나 은은하던지 바로 그 음악 씨디를 산 적이 있다. 자주 다니던 길목에서는 느끼지 못한 신선한 자극은 마음으로 들리는 작은 울림이었다.


말도 음악도 상대의 행동도 작은 울림은 나를 편안하게 만든다. 나는 은은하게 울리는 음악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곁에서 존재감이 크지 않아도 있음으로 해서 편안함을 주는 그런 친구이자, 한 사람이기를 바란다. 원색에 가까운 하루하루 보다는 은은함을 풍기는 소소한 한 날이기를. 멋든 카피 한 줄을 쓰더라도 눈이 가고 마음이 가는 서서히 물드는 글이고 싶다. 먼 걸음으로 향을 따라 찾아가는 맛을 내는 글을 쓰는 작가로 남고 싶다. 단맛은 귀에 좋은 말이고, 짠맛은 뇌에 자극적인 소식이요. 신맛은 미숙한 행동이다. 은은함은 귀에 이끌리는 소리요, 잔잔함은 생각에 내리쬐는 마음이다. 모든 작은 울림의 격려가 빛바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그 은은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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