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 조각, 새벽이다. ‘일어나자’ 하고 잠은 깼으나 다섯 시 정각을 지나버렸다. 지각이다. 줌 화면을 켜니, 독서 멤버들이 다소곳이 독서 중이다. 곧, 나도 새벽 독서에 집중한다.
오늘은 지담 작가(독서 리더)가 한나 아렌트의 글을 발췌하여 공유한 문장으로 토론한다.
‘자기현시’가 살아있는 존재가 간직하는 모든 속성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라면, ‘자기표현’은 어느 정도의 자각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자각은 정신활동의 반성적 성격에 내재된 능력이며, 분명히 우리가 고등동물과 공유하는 단순한 의식을 넘어서는 능력이다*
그러고 보니, 비록 줌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습관이나 독서 토론 시 나의 경험을 곁들여서 의견을 나누는 일 또, 몸과 마음의 상태가 행동으로 드러나는 모습들은 모두 자기현시인 셈이었다. 나라는 존재의 모든 속성들 말이다. 특별히 내가 자각하지도 않아도 드러나는 것들이다.
하지만, 자기표현은 깨달음이 있은 후에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드러내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자각이라는 말은 현실을 판단하여 자기의 입장이나 능력을 스스로 깨달음을 뜻한다. 나의 입장이나 능력에 대해서 ‘나는 내가 이러이러해서 그런 것이었구나'하면서, 크게 느끼게 되는 상태이다.
이 말은 아무래도 새벽 독서를 시작한 이후 자주 쓰는 것 같다. 자각 현상이 일어나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읽고 있던 책과 일맥상통할 때 자각했고, 같은 문장을 읽었더라도 서로 다르게 자각하여 사실보다 크게 또는 아주 작게 각자의 방식대로 표현되고 있었다.
평소에 자각하기까지 생각하는 과정을 몸소 겪어보았기 때문에 한나아렌트의 문장을 공유하고 난 후, 또다시 '자각을 자각하고 있는지 자각'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생각했다. 공중에 던져진 돌이나 공과 같은 방향으로 바람이 불 때는 공의 속도가 증가할 수 있으나, 반대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서 공의 속도가 감소될 수 있다**는 말처럼, 자각도 같은 이치이지 않을까. 내 머릿속에 흐르는 생각을 인식하고 있는 것과 의식하는 것의 그 차이를 자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계속해서 흐르는 생각을 끊어낼 수 있거나 생각(관점)이 반대로 흐르도록 의식할 수 있다면 자각인 것이다.
자기현시와 자기표현으로 돌아가면, 누군가와 말을 나누지 않았어도 그 사람을 잘 알지 못해도 그 사람의 속성은 드러날 수 있다. 작가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7월의 어느 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본 적이 있었다. 론 뮤익이라는 작가는 이름도 작품도 접해본 적 없었는데, 인체를 묘사한 작품 하나하나가 사실적 표현을 넘어, 보고 알고 느끼던 것 이상의 과감한 실험처럼 느껴졌다. 작가의 인간 분석력과 재해석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고, 나의 미술적 무지의 베일이 벗겨지는 것 같았다. 다른 관람객들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론 뮤익 작가는 살아있는 인간이 간직하는 모든 속성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주름, 땀구멍, 핏줄, 근육 그리고 평소 들여다보지 못했던 세세한 표정과 시선을 관찰하다 보니, 만들어진 그 사람의 생각과 고뇌까지도 예측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론 뮤익의 자기표현은 현시적인 생생함, 사실적인 상상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글, 작품, 표현방식은
작가의 모든 속성을 말해준다.
감정과 정신과 언어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르게 바라보는 관점의 이유는 분명, 자각했던 경험이 녹아든 것에 있다.
오늘의 글, 오늘의 생각, 오늘의 작품은 딱 오늘의 ‘나’이다.
*정신의 삶, 한나 아렌트, 푸른숲, 2019
**방법서설, 데카르트, 소두영 옮김, 동서문화사, 2019
[빛작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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