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진주의 한 서점에서 북토크를 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동종업계 후배들을 위해 공저로 출간한 저서의 북토크였다. 짧은 강연 후 참석자들과 대화하는 순서로 진행되었고 나는 ‘직장에서 롱런하기 위한 마음 습관’이란 주제로 한 순서를 맡았다.
질의응답 시간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소심하고 내향적인 성격이어서 직장생활에 적응하는 게 힘들었다고 하셨는데 지금 모습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거든요. 저도 그런 편인데, 바뀔 가망이 있는 걸까요?” 아마도 자기보다 여유로워 보이는 몇 년 선배의 강단 위 모습에 그런 의구심을 가졌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한 시간 반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내 목덜미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던 식은땀과 어둑한 조명에 가려진 붉게 익은 두 뺨, 그리고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쓰고 지우고 외던 가방 속 스크립트를 말이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나름의 조언을 건넸다. 그렇게 어찌어찌 북토크를 마쳤다.
행사를 마무리하고 조금은 한산해진 서점에 서서 긴 호흡을 내뱉었다. 끝났구나. 안도의 한숨과 함께 서점을 잠깐 거닐었다.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데 책이 있는 공간만큼 완벽한 장소는 없다. 서가를 기웃거리다 한 책 앞에 걸음이 멈췄다. 《내밀 예찬》, 은둔과 거리를 사랑하는 어느 내향인의 소소한 기록. 제목과 거기에 딸린 부제가 마음에 꽂혔다. 혼자만의 세계를 잘 가꾸고 보살피려는 저자의 내적 고백을 몇 장 후루룩 읽어 내리고는 그대로 결제를 해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사람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웃고 떠들어 봐도 결국 이런 책에 마음이 끌리는 걸 보면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결국 내향인인 거라고. 꾸며낸 겉모습 아래엔 이렇게 내밀한 것에 끌리는 민낯이 숨겨져 있다고.
타고난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건 슬프지만 불변의 진리임이 틀림없다. 아무래도 난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지금도 보라. 활기찬 카페 안에서 고립되어 책과 노트북을 펼쳐두고는 글과 씨름하며 유유자적을 즐기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성향은 아주 어릴 적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또래들과 술래잡기를 하기보단 책에 파묻히거나 몽상에 잠겼고,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시끌벅적한 수련회에 가기 싫어 아픈 척을 한 적도 있었다. 대학 시절엔 공짜 술자리에 쾌재를 부르며 달려가는 동기들 틈에서 ‘사람멀미’를 하며 하얗게 질렸으며, 사람 대하는 일을 본업으로 삼고부턴 퇴근 후 집에서 나 홀로 재충전하는 시간을 확보해야만 다음 날 출근이 가능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나만 아는 ‘위장 외향인’의 본모습인 것이다.
그림에서 엿본 내밀 예찬, <책벌레>와 <가난한 시인>
카를 슈피츠베크(Carl Spitzweg, 1808〜1885)의 그림은 찐 내향인의 방구석 1열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슬그머니 웃음이 지어진다. 슈피츠베크는 독일 낭만주의와 비더마이어 양식을 대표하는 화가다. ‘비더마이어(Biedermeier)’란 17세기 초중반 독일을 비롯한 중부 유럽에서 시작된 예술 경향으로 도시 중산층의 실용적이고 간소한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비더마이어 특유의 꾸밈없고 편안한 매력을 지닌 슈피츠베크의 그림은 재치와 유머로 가득해 한 번만 봐도 눈길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그중 내가 가장 애호하는 작품은 〈책벌레〉라는 그림이다.
카를 슈피츠베크, 책벌레, 1950
낡고 고풍스러운 도서관의 깊은 곳, 한 남자가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 중년 즈음 되었을까. 천장에 난 창에서 햇살 한 줌이 희끗한 머리칼을 비추고, 남자는 꽤나 심오한 표정으로 손에 든 책을 들여다보는 중이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사다리에 올라서서 양손에 책을 쥔 것으로 모자라 오른쪽 허리춤에 한 권, 무릎 사이에 또 한 권을 끼운 채 정신없이 책에 파묻혀 있는 모습은 너무 진지해서 오히려 귀여운 구석이 있다. 그가 파고드는 책은 어떤 책일까. 소설이나 시? 혹은 비문학 서적일까? 그의 독서 취향이 궁금해진다. 책이라는 세계에 몰두하고 있는 책벌레, 즉 서치(書癡)를 묘사하는 재미있는 그림이다.
작품의 원제는 〈책벌레〉가 아니었다. 슈피츠베크가 그림을 완성한 후 붙인 원래 제목은 ‘사서’였지만 사람들은 ‘책벌레’라고 이름 붙였다. 아마도 그림 속 남자가 서 있는 서가의 제목이 ‘METAPHYSIK’, 독어로 ‘형이상학’이란 것에서 착안했을 것이다. 그가 실제 세상에서의 경험이 아닌, 생각과 사고만으로 만물을 이해하려는 인물임을 놀리듯이 별명 붙인 제목이리라. 하지만 난 왠지 그를 비웃기보단 응원하고 싶어진다. 내게도 그와 닮은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바깥세상 일일랑 제쳐두고 책이 속삭이는 내밀한 이야기에 매혹된 경험이 있다면, 누구든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카를 슈피츠베크, 가난한 시인, 1837
그런가 하면 그의 또 다른 대표작 〈가난한 시인〉에서는 골방에 틀어박혀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또 하나의 인물이 등장한다. 어느 허름한 다락방에 한 시인이 누워 있다. 두꺼운 외투와 낡은 침대 그리고 책들에 둘러싸인 그는 펜대를 입에 문 채 시적 심상을 떠올리려 애쓰고 있다.(혹은 손 위의 빈대를 노려보거나) 그의 생활은 ‘시인’하면 떠오르는 ‘우수에 찬 예술가’ 이미지와는 딴판이다. 퀴퀴하고 남루한 방구석, 빗물 새는 천장에 끼워둔 찢어진 우산, 원고 꾸러미를 불쏘시개 삼아 난로에 처박아 둔 모습까지. 친구나 손님이 방문한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먼지 쌓인 방 안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외로이 시를 써왔으려나. 사실적이고도 익살스럽게 그려진 시인의 모습은 ‘웃퍼’서 오히려 인간미가 묻어난다.
뛰어난 풍자 화가였던 슈피츠베크는 책벌레와 가난한 시인의 개성적인 모습을 위트 있게 그려내며 많은 독일인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가난한 시인〉은 한때 독일인이 가장 사랑한 그림 2위에 선정되기도 했다.(1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다.) 미술사적으로 높이 평가받던 역사화나 종교화도 아니고, 광활한 대자연을 담거나 조형미가 뛰어난 작품도 아니건만 어떻게 이토록 일상적이고 평범한 그림들에 대중들은 러브콜을 보낸 걸까. 그건 아마도 슈피츠베크가 혼자 있는 인간의 가장 솔직하고 은밀한 순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특유의 따스한 시선으로 친근하게 표현해 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그림 속에서 세상과 동떨어져 혼자만의 은근한 사생활을 즐기는 인물들은 우리네와 조금씩 닮아 있다. 바깥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시끌벅적하게 보내다가도 ‘얼른 침대에 누워 쉬고 싶다’며 딴마음을 품고, 낯선 타인과 아무렇지 않게 소란스런 대화를 이어가지만 조금씩 에너지가 방전되어 감을 느끼는 모습.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위장 외향인’의 일면을 가지고 있지 않나. 내향적인 성격이 사회생활에 좋지 않다며 터부시하고, 활발하고 사교적으로 어울려야만 한다고 믿고 있지만 실은 누구나 조금씩은 내향(內向), 즉 내면을 향하고픈 욕구를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바로 그러한 사회인의 속마음을 넌지시 비춘다는 측면에서 슈피츠베크의 그림은 묘한 동질감과 조용한 응원을 불러일으킨다.
내밀함을 포기하지 않을 용기
학습된 외향성으로 나답지 않게 너스레를 떨고 억지로 텐션을 올리다 문득 ‘나 지금 뭐하고 있지’라고 느낄 때면 슈피츠베크의 그림 속 인물들처럼 어딘가에 콕 틀어박혀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어진다. 도서관이나 서점, 집 또는 카페처럼 익숙하고 편한 공간에서 골똘히 혼자만의 세계를 부유하는 경험은 재충전을 위해 필수적이다. 이 사회는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한 인간관계를 강조하며 개인이 온전한 개인으로서 존재할 권리를 자주 박탈한다. 구태여 사람과 어울리지 않아도 괜찮고 골방에 틀어박혀 고요히 숨을 골라도 상관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슈피츠베크의 그림은 부담 없이 담백한 구석이 있다.
한때 나는 내가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책벌레이자 세상과 괴리된 시인인 양 사람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구는 스스로가 답답했고 혼자 있는 시간에서 기쁨을 느끼는 자신을 구박했으며 유창한 달변가를 부러워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외향성을 치열하게 ‘학습’한 이후로는 줄곧 나와 주변 사람들을 속여왔다. 잘 웃고 쾌활해 보이는 겉모습에 몇몇 사람들은 실제로 속아 넘어가는 듯했고, 재미 삼아 해본 성격유형검사에서 간당간당하게 E(외향성)라는 결과가 나오자 ‘진짜 나 외향인 된 거 아냐?’하고 슬며시 승리의 미소를 짓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굉장히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본모습을 부정하고 오히려 미워하려는 아이러니. 정작 내게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건 온갖 내밀한 것들인데 말이다.
카를 슈피츠베크, 우산 아래 누워있는 화가, 1850년경
슈피츠베크의 그림 속 인물들처럼 혼자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커피를 홀짝이고, 홀로 극장을 찾아 영화를 보며, 혼밥 중 창밖의 세상살이를 관찰하다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나의 내밀한 역사들. 결국 나를 지금까지 버티게 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준 것은 위장 외향인이란 꾸며낸 가면이 아닌, 이토록 개인적이고 고유한 경험들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내가 내향인이라는 것을 숨기거나 구태여 고치려 들지 않는다. 누군가 성격에 대해 물으면 “외향인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전 원래부터 내향인이더라고요. 사실은 낯을 많이 가려요”라고 고백한다. 퇴근 후 만나서 밥이나 먹자는 지인의 말에 오늘은 혼자 시간을 좀 보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할 용기도 제법 생겼다. 그렇게 확보한 혼자만의 세계 속에서 전에 없던 해방감을 누리고 있다. 역시, 타고난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슬프게도, 기쁘게도.
지난 북토크에서 “저도 바뀔 가망이 있을까요”라고 묻던 후배에게 “그럼요, 당연하죠”라고 답변했지만 속으로는 그가 자신의 내밀함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있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사람들과 부대끼고, 원치 않는 관계나 사회생활에서 때론 피로함을 느끼기도 하고, 그래서 ‘난 왜 이럴까’ 하고 고민하는 날도 있겠지. 그래도 그 과정에서 타인과의 느슨하고 적당한 거리를 발견하며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찾아 내밀 예찬을 누렸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내밀하다는 건 결국 연약함보단 단단함에 더 가깝다는 걸 깨닫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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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 마음을 모르는 나에게 질문하는 미술관>의 온라인 서점 입고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림에서 건져 올린, 삶에서 순간순간 마주하게 되는 25가지 질문들을 명화 그리고 화가 이야기와 곁들여 만나 보세요. 다정한 그림들과 함께 포근한 봄날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