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캔줌마 May 11. 2024

회개의 이유

사도행전 2, 3장

저는 그동안 교회에서 '죄를 회개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예배 중 앞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들도 우리 안에 있는 시기심, 서로를 향한 미움, 욕심, 거짓 등을 나열하며 용서를 구하곤 하지요. 그러면서 그러한 잘못들을 '회개'한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다 보니 저는 이러한 일상의 '회개'와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에 있어서 온도차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이 '회개'라는 단어는 반복적인 동일한 사건을 통해 사용되는 듯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마다 이 '회개'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광야에서도, 분열왕국시대에도,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후에도 이스라엘 민족들은 우상을 섬기다가 '회개'하고 다시금 하나님께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넘어오자 이 '회개'라는 단어의 사용이 보다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사도행전 2장 36절~38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죽인 예수는 사실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다.'라고 전하자 유대인들이 울상이 되어 '그럼 우리 이제 어떡하죠...?'라고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묻자 '회개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 다음장(사도행전 3장 14절~19절)에서도 연이어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중략)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고 권면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회개할 이유가 '예수님을 죽인 죄'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죽인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 구원에 이르라고 호소합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저의 '느낌적인 느낌'이 얼마나 신학적으로 옳은 해석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웬지 이 '회개'가 촉구되는 사건들을 성경 전체에서 살펴보면 신약에서 예수님을 죽이는 사건은 구약에서 수십 차례 등장하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따르는 사건과 통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더 되짚어 올라가면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까지. 이 세가지가 본질적으로 같은 사건들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하나씩 차근차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에는 예수님을 죽인 '어떤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과 나는 상관은 없었지요. 그들은 악하고 어리석은 유대인들이었으니까요.

구약에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배반했던 사람들 이야기를 해 볼까요?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직접 체험하고도 우상을 끊임없이 숭배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어리석은'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광야 1세대들은 그 대가로 가나안 땅을 밟지도 못했지요.

예수님을 죽인 '악한'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들은 기적을 행하며 사역을 하시는 예수님을 실물영접하고도 하나님이신지 알아보지 못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산채로 못박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악과를 따먹은 것도 나와는 상관없는, 인류의 먼 조상인 아담과 하와였지요.


예수님을 죽인 죄는 이 과거의 사람들의 것이니 그들의 것으로 두고, 그런 죄는 없는 저는 남을 미워한 죄, 욕심을 부린 죄, 거짓말 등이나 회개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사실 저는 그런 것조차 진심으로 회개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그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당연한 본성이자 생존을 위한 방식이고, 누군가 그런 것들을 멀리하며 '성자(聖者)'처럼 살 수 있다면 그것은 현실도피이거나 위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앞서 복음서의 '사흘째 되던 날'을 통해 나도 그 시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도 예수님을 죽이는 데 동참했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신 후, 하나님은 오늘의 성경 읽기를 통해 저에게 확인사살이라도 하시듯 예수님을 죽인 죄를 회개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었습니다.  


그래. 네가 예수를 죽인 것이 맞아.
그러니 회개해라.

오 마이 갓.

제가 회개해야 할 것은 미움도, 시기도, 욕심도 아닌 바로 예수님을 죽인 죄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이 엄청난 죄 앞에서 다른 무엇이 더 우선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를 성찰하고 비윤리적이거나 미성숙한 행동들을 반성하며 더욱 성숙한 인격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자아성찰과 반성, 성숙한 인격은 교회 안의 성도들 간의 교제에도 분명히 긍정적인 역할도 하겠지요. 그렇지만 예수님을 죽인 죄 앞에서 이런 것들은 한없이 작아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성찰과 성숙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다른 종교에 더 많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에 대해 '회개한다'라고 하기보다는 '반성한다'라고 해야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저는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말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그렇게 많은 설교들을 듣고, 나름 성경지식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십수 년 동안 저는 정작 제가 해야 하는 회개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을 죽인 죄. 그 죄를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죽인 죄를 회개합니다.

제가 육신을 입고 오신 당신,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제가 당신을 채찍질하고 가시관을 씌우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사랑하셔서 저의 죄를 없다 해 주시고, 저의 죄를 잊어주시고, 저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사랑에 항복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매거진의 이전글 삶의 해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