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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프리랜서 May 21. 2020

#6. 상대방이 패를 먼저 깐다면?

돈보다 커리어에 투자를 할 때

2014년 11월 어느 추운 날.


예비군이 잡혀있는 날이라 오랜만에 아침 일찍 일어났다.

이제 고작 3개월 차에 접어든 프리랜서지만(아직은 회사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남아있을 시기였다) 이미 생활패턴은 올빼미족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비몽사몽 지친 몸을 이끌고 예비군 훈련장으로 출발했다.

한창 훈련을 받고 난 후 점심시간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모르는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누구지...?


점심시간을 틈 타 전화를 해봤다.

여보세요? 부재중 연락이 와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혹시 모션그래픽 영상 제작하시는 분 맞으실까요?

네 맞는데 어디신가요?

네 저는 mcm korea의 마케팅 담당 아무개 대리입니다.

네? mcm이요?

네. 저희가 이번에 코엑스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새로 오픈하는데 매장 안에 설치될 디스플레이에 상영될 영상이 필요한 차에 마침 포트폴리오를 보게 되어 연락드려봤습니다.

괜찮으시면 한 번 만나 뵙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네 당연히 가능하죠!!


아니 mcm이라니...
내가 아는 그 mcm 이 맞는 걸까?


이렇게 마켓플레이스를 통하지 않은 첫 번째 외주 프로젝트 의뢰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들어오게 되었다.

일단 흥분을 가라앉혔다. 예비군이 끝나고 나서 미팅 날이 다가왔고 알려준 주소로 도착해보니...

내가 지금 mcm korea 본사에 와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성주그룹 MCM Korea 사옥


마켓플레이스 담당자를 대동하지 않고 직접 외주제작을 해보기는 처음이라 약간 긴장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여러번 프로젝트 미팅을 가진 경험이 있고 사실 그 동안 마켓플레이스 담당자의 역할이라고는 같이 동행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라고 느끼고 있던 참이라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우리는 만나 인사를 나눈 뒤 지하 사무실로 내려가 미팅을 가졌다.


얘기를 들어보니 영상의 길이는 약 30~40초 정도 되는 분량이었다. 어떤 내용이 담기기보다는 MCMLAB이라는 스토어의 컨셉과 어울리는 매장에 상영될 디스플레이용 영상을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그냥 들어서는 어려울 것 없어 보였지만 최근 마켓을 통해 진행했던 영상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라 살짝 겁도 났다.

당시 참고했던 이미지 자료


심지어 매장 오픈식 당일날 틀어질 15초 정도 분량의 티저 영상도 부탁을 하셨었다. 

그러니까 총 30~40초 분량의 영상과 15~20초 정도 되는 영상까지 총 2개를 3주 안에 만들어내야 했다.

뭐 기간과 총 러닝타임으로 치면 그렇게 빠듯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걸 2개로 나눈다면 얘기가 다르다.

그 이유는 기획이 2개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1분짜리 1개를 만드는 것보다 30초짜리 2개를 만드는 게 그래서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어쨌든 영상에 대한 얘기를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견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마켓플레이스를 통해 이미 정해진 견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기 때문에 직접 견적 조율을 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몰라도 보통 이런 경우 을이 먼저 견적을 제시해야 하는 게 기본 룰이다. 그런데 너무나 스스럼없이 MCM 측에서 먼저 예산을 오픈하셨다.

하지만 예상금액을 왜 먼저 오픈했는지 곧 알 수 있었다.


견적은 마켓플레이스를 통해 수수료를 떼고 받았던 금액보다도 분량 대비 낮은 견적이었다.


그럼 그렇지....


처음 연락 왔을 때의 설렘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예상해보자면.... 생각보다 영상에 투자할 예산은 부족했고 그 예산으로 전문적인 프로덕션에 맡기기는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거다. 그래서 프리랜서를 찾다가 마켓플레이스까지 발견하게 되었고 그러다 나에게까지 연락이 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마켓플레이스를 통해 프로젝트를 진행 하지 않았을까?


답은 간단하다.

30퍼센트라는 수수료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

만일 300만 원의 예산이 있다고 치자.

마켓플레이스에 프로젝트를 등록해서 프리랜서를 구해 영상을 제작하고 마무리가 되었다면 그중 30퍼센트인 90만 원은 마켓플레이스에게 가고 나머지 210만 원 만에 프리랜서에게 돌아간다.

그런데 마켓플레이스에는 나름대로 책정한 분량 대비 견적가가 있다.

당연히 가지고 있는 예산 가지고는 수수료까지 내가면서 프로젝트 의뢰를 맡기기는 어려웠을 테니 예산안에서 다이렉트로 프리랜서에게 의뢰하면 수수료도 아끼고 괜찮겠다 싶어서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견적 조율도 결국 포커게임과 비슷하다.


포커에서 내가 가진 패가 좋지 않다면 싸우기를 포기하고 바로 패를 까야한다.

견적 조율도 마찬가지로 회사가 가지고 있는 예산이 누가 봐도 부족하게 느껴진다면(대부분 본인들 스스로가 이미 느끼고 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90프로는 제작사들에게 먼저 예산을 오픈한다.

한 마디로 우리가 영상에 투자할 예산은 이 정도밖에 없으니 가능하면 이 예산으로 우리가 원하는 퀄리티의 영상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조율을 하기에도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니 그냥 냅다 까라 오픈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아... 이 프로젝트해도 괜찮은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여태까지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면서 마켓플레이스를 통해 4번의 프로젝트를 모두 성공적으로 끝내 자신감이 한창 올라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돈도 안되면서 그동안 시도해보지 못한 스타일을.. 그것도 2개나 정해진 기간 안에 만들어내야 하는 이 프로젝트를 과연 하는 게 맞는 걸까? 미팅을 하고 보니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고민 끝에 결국 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그 수많은 프리랜서 중에서 나에게 연락을 준 것이 고마웠다.

그리고... MCM이지 않은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패션 브랜드에서 들어온 의뢰인데 당시 커리어도 없던 내가 마다할 처지가 되지도, 이유도 없었다. 물론 마켓플레이스를 통해 제작한 영상포트폴리오가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스타트업이었기 때문에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이름있는 회사의 포트폴리오가 간절했다.


그렇게 첫 개인 외주 프로젝트를 MCM이라는 브랜드의 영상으로 시작하게 되었고 3주간 최대한 많이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제 날짜에 완성될 수 있도록 밤낮없이 작업에 매달렸다.

영상의 느낌은 MCMLAB이라는 실험실 콘셉트의 매장의 느낌을 살려서 최대한 비슷한 분위기를 내면서 MCM 고유의 분위기도 놓치지 않도록 아트워크에 신경 써서 작업해야 했다.

STYLE FRAME DESIGN


결국 3주간 죽어라 빡세게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다행히 오픈 당일 전날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첫 개인적으로 들어왔던 의뢰라는 것과 그 클라이언트가 MCM이라는 사실 하나가 적은 금액일지라도 해야 할 필요조건을 충분히 만들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코엑스의 MCM 매장에 내 영상이 돌아가는 큰 즐거움을 실제 두 눈으로 확인해볼 수 있었던 아주 만족스러운 프로젝트였다.



이 경험을 통해 하고 싶었던 얘기는 상대측에서 먼저 견적을 오픈한다는 것은 대부분 예산이 정해져 있다는 것.

정해진 예산이라는 것은 대부분 한참 부족한 예산이라는 것이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만일 내가 받는 견적보다 더 높은예산을 미리 오픈해준다면 그건 그냥 땡큐하면 된다. 다만 예산을 오픈했다고 곧이 곧대로 다 받아버린다면 나중에 탈이 날 수 있으니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이 얘긴 나중에 다시 한 번 얘기해보겠다)

고할지 스탑 할지는 본인의 선택이나 프리랜서 초창기라면 한 번쯤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 막 첫 발을 내디딘 프리랜서라면 아직 본인의 커리어나 경력, 포트폴리오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가끔씩은 돈보다는 이 작업을 했을 때 내가 얻을 수 있는 다른 가치를 생각해보고 그 가치에 투자할만하다는 판단이 든다면 모험을 해 보는 것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MCM COEX flagship store 매장 내 상영된 영상


https://youtu.be/HfxfHat16h4

매장에 상영되었던 MCMLAB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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