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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밝음 Jun 14. 2024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에 떠내려가지 않는다.

나는 많은 순간 졌다. 달리기 계주로 나갔지만 졌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교를 열심히 다녔지만, 수능에서는 졌다. 분명 내가 먼저 좋아했던 오빠였는데 걔한테 졌다. 내가 먼저 입사해서 인정받으며 일했는데 나만 결혼하고 퇴사해서 졌다.


수많은 경쟁에서 졌고, 수많은 비교에서 밀렸다. 수많은 도전에서 떨어졌고 수많은 기회에서 낙오했다. 어떤 때는 노력이 부족해서, 어떤 때는 능력이 모자라서, 어떤 때는 운이 없어서, 어떤 때는 그냥. 그렇게 수많은 순간에 졌다.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중에서



김연수 작가의 문장을 보고 나니 많은 순간 졌다는 나의 해석이 우습다. 진다는 건 재주나 힘을 겨루어 상대에게 꺾인다는 뜻이다. 분명 수없이 졌지만 상대에게 꺾인 적은 없다. 나를 이긴 사람들은 나를 꺾고 이긴 게 아니라 자신의 시도 안에서 자신의 승부에서 이긴 것뿐이다.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를 이겨왔다고 생각했고, 누군가에게 졌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돌아보면 우린 누군가를 이긴 적도 누군가에게 진 적도 없다. 오직 나를 이기거나 나에게 졌을 뿐.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성불패'라는 말을 안다. 사자성어 같지만, 아니다. 그건 한화이글스의 레전드 선수인 구대성 선수의 별명이다.


대.성.불.패(大盛不敗): 구대성은 지지 않는다.


순위 꼴찌팀에다가 투수에 대한 지원이 넉넉지 않았던 팀에서 구대성 선수는 선발, 중간, 마무리를 오가며 마운드를 호령했다. 그런데도 본인은 절대 혹사당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한 이닝이라도 공만 더 던질 수 있다면 항상 좋았고 고마웠다고 말한다. 천재라고 불렸지만, 실은 누구보다 많은 연습과 완벽을 추구했고 야구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순간 졌겠지만, 그는 지지 않은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과 비교한다면 내 삶은 뒤처지고 모자라고 진 순간들이 무수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덧대지 않고 그냥 나 자신만 바라보면 분명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어려웠던 순간들을 이겨냈던 내가 있었고, 슬프지만 살아낸 내가 있었다. 영원할 것 같은 고통에서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낸 내가 있었고, 절망과 우울이 쳐도 벗어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내가 있었다.


내가 내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나는 지지 않는다. 낙담하고 무력해지지 않는 한 여전히 나는 달리고 있다. 삶의 고난과 역경이 밀려와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기에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삶이라는 달리기를 사랑한다. 다리가 아프고 숨이 턱까지 밀려오기도 하겠지만 나만의 페이스로 끝까지 완주할 것이다. 죽은 물고기가 되어 물에 떠밀려가듯 살아가지 않으려 한다. 웅덩이에 갇히고 옆길로 잘못 들어서 곧장 바다로 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그 끝이 어디든 스스로 헤엄쳐서 나아갈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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