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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밝음 Sep 23. 2024

살던 곳의 향수

내가 살던 그곳이 내게 남긴 것들

 어린 내가 살았던 그곳은 항상 습기가 가득했다. 나지막한 주택들이 즐비한 동네에 홀로 어색하게 우뚝 선 5층 건물. 그곳에 우리 집이 있었다. 꼭대기에는 도깨비 뿔 같은 커다란 굴뚝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동네에 있는 유일한 목욕탕이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은 이모네가 운영하는 목욕탕 건물의 옥상에 간이 집을 짓고 살았다. 그땐 우리 집 형편이 그러해서 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파트에 이사하기 위해 돈을 모으기 위한 방편이었다. 친구들에게 겉으론 보이는 건 거대한 목욕탕에 사는 부자 아이였지만, 실상은 초라한 옥상 집에서 좋아하는 친구도 마음대로 초대할 수 없는 신세였다.


 1층은 여탕, 2층은 남탕, 3층은 에어로빅장, 4층은 이 건물의 주인인 이모네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한 층을 더 올라가면 5층인 옥상 우리 집이 나왔다.

 연보라색 벽에 회색 석면 슬레이트 지붕을 가진 집은 컨테이너 식으로 지어져 태풍만 오면 아기 돼지 삼 형제의 집처럼 날아갈까 잠 못 이루는 날이 허다했다. 방과 부엌, 화장실로 나뉘는 보통의 집과는 달리 단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집. 말 그대로 단칸방인 셈이다. 

 엄마는 목욕탕 운영을 해야 하는 이모를 대신해 이모네 집 살림을 살아주었다. 식사 때가 되면 4층으로 내려가 다 함께 밥을 먹었고, 용변을 봐야 할 일이 생겨도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하는 수고를 감수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는 늘 습기 가득한 공기를 만나야 했다. 1~2층을 지날 땐 목욕탕 특유의 물 냄새가 났다. 가끔 손님들이 없는 청소 시간에 남탕에 들어가 보기도 했는데 신기했던 건 같은 목욕탕인데도 여탕과 남탕에서는 다른 냄새가 났다는 것이다. 3층을 걸어 올라갈 땐 에어로빅하는 사람들의 우렁찬 구령 소리와 시끄러운 음악, 그리고 땀 냄새가 가득했다. 뜨거운 땡볕 아래에서 만들어진 삶의 땀 냄새와 달리 아드레날린의 도움으로 배출된 땀 냄새는 싫지 않은 불쾌한 냄새였다. 옥상에 도착하면 또다른 습기가 있었는데 물탱크와 목욕탕 굴뚝 보일러에서 나는 따뜻한 수증기 냄새였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동생에겐 그 건물 전체가 놀이터였다. 언제든 마음대로 목욕탕을 이용할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어 어린 나의 눈은 항상 관찰하기에 바빴다. 주인집인 이모네에서 노는 건 큰 혜택이었다. 뛰어다닐 수 있을 만큼 큰 거실에 사촌 언니들의 방에는 멋진 피아노와 마론인형이 넘쳤다. 그 당시 유행했던 갤러그 같은 팩 게임도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할 수 있었으니, 형편과 달리 운이 좋았다. 


 층층이 돌아다니며 많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던 건물이었지만 유별나게도 내 마음이 편했던 건 초라한 우리 집이 있던 옥상이었다. 우리 가족 외엔 어떤 사람도 기웃거릴 일 없는 공간.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공간이었지만 그곳에서는 늘 마음이 가득 찼다. 

 좋은 아파트에 갈 미래를 그리며 넷이 나란히 누워 자던 밤들, 회색 처마 끝에 매달린 겨울 고드름, 태풍에 물난리가 나서 쓰레받기로 열심히 물을 퍼내던 기억까지. 가족의 사랑과 행복은 다른 어떤 수단이 아닌 우리 자체로 만드는 것이란걸 그때 몸으로 배웠다.


방편을 찾아 행복을 구하려 할 때마다 그 시절을 떠올린다. 따뜻한 수증기 냄새의 잔흔과 함께 저장된 심연 속 유년시절. 행복은 지금, 여기서 행복하고자 하는 이의 곁에 언제나 머물러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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