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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밝음 Sep 24. 2024

가을을 알아채는 순간

아름답고 슬픈 나의 가을을 반기며

"엄마! 밤 되면 나는 이 소리는 뭐야?"

"응, 귀뚜라미 소리"


 저녁 산책을 하던 중 막내가 귀뚜라미 소리를 묻는다.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내가 가을이 왔음을 알아차리는 첫 증표다. 세상에 귀뚜라미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 내 마음에는 아빠가 울린다. 매미가 온몸 다해 울면 엄마 제사 때라는 걸 알게 되고,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면 아빠 제사를 지내야 할 때라는 걸 알게 된다. 굳이 날짜를 세며 고대하고 싶은 날은 아니기에 계절의 소리에 기대어 어림짐작하다 달력의 동그라미를 확인한다.


 "딸! 아빠 미안하다. 가을이네. 아빠 선물이다. 사랑해."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밤. 책상 위에 아빠의 필체가 적힌 A4용지 한 장과 마른 낙엽 두 잎이 올려져 있었다. 생일 때도 졸업 때도 아빠는 선물을 챙긴 적이 없었다. 그런 아빠에게서 받게 된 첫 선물이었다.


 엄마가 하늘로 떠나면서 아빠는 절망의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공부도 운동도 잘해서 늘 동경했던 멋진 아빠는 사라지고 매일 알코올 냄새를 풍기는 초라한 한 남자가 남았다. 집에 들어올 때나 집을 나갈 때나 서로 인사를 받지도 주지도 않는 데면데면한 부녀지간이 되었다. 알 길 없는 아빠의 마음속을 평생 원망하며 지냈다. 딸들이 어떻게 살든 안중에도 없어 보였던 아빠였는데, 처음 내미는 어색한 고백에 그 모습이 다는 아니었음을 안도했다.


 아빠의 죄를 따져 묻자면 마음이 약했던 게 죄목일 것이다. 혼자서는 도저히 생을 일으켜낼 수 없는 유약한 마음, 엄마에게 너무 기대고 사랑했던 마음. 그게 아빠의 큰 죄였을지도 모른다.

 끝끝내 삶을 회생시키지 못한 아빠는 소원하던 이십 년 만에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차가운 납골당 벽장에서 나와 아빠와 함께 따뜻한 땅에서 다시 만나던 그날은 나의 서른네 번째 생일날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가을에 나를 낳고, 가을에 다시 돌아갔다. 가을은 내게 사랑이자 이별이다.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가을이 왔다. 아빠의 마음이 담긴 종이를 꺼내어 본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았던 아빠의 유일한 선물 속에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빠의 사랑까지 모조리 긁어모은다. 


가을은 아름다운데 자꾸 슬프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 환상처럼 사라져 버리니까.


나에게 가을은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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