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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밝음 Oct 10. 2024

어른으로 산다는 것

어른이기 이전에 한 명의 인간으로 살고 싶은 마음

현상 너머를 보는 눈, 

헤아려 듣는 귀, 

열 때와 닫을 때를 아는 입, 

즐겁고 가벼운 마음. 


이것은 마흔 생일에 내가 받고 싶은 네 가지 선물이었다. 불혹은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는 나이라고 말한 공자님의 말씀이 모두에게 해당하지 않는 것이며, 거저 되는 일도 아니라는 걸 마흔을 넘기고서야 알았다. 어른이 되면 저절로 단단해지는 줄 알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힘든 일이 있어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건 줄 알았다. 그래서 더는 아프고 싶지 않아서 그런 선물을 바랐다. 지금보다 좀 더 지혜롭고 현명해지면, 한 걸음 더 용기 있고 강한 사람이 되면, 내 삶을 원망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아서.


마흔의 생일에 한 번의 생일이 더 지났음에도 여전히 나는 솔바람에도 흔들리며 산다. 작은 일에 연연하고 코 앞의 문제에 전전긍긍하느라 먼 미래를 건설할 마음의 여유 같은 건 없다. 하루에도 수십번 종지 같은 마음 그릇에 쌓인 쓰레기 치우기에 바쁘고,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노라 일체유심조를 외워보지만 이내 속에선 "네 탓이다."를 먼저 외친다.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극명함은 하늘과 땅 차이보다도 크다. 이제는 불혹의 선물 같은 건 꿈속에 던지고 지금의 내 모습을 애틋이 바라보려는 중이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작전을 잘못 짜서 일찍 어른이 되었다. 자세히 말하자면 어른 같은 아이였다.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작은 몸의 아이는 사랑받고 싶고 미움받기 싫은 마음을 의젓함으로 표현했다. 손 안 가는 아이, 알아서 하는 아이, 분위기 파악 잘하는 아이, 착한 아이.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라는 옷을 입고 사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혼나는 일도 없었고, 기특하다고 칭찬받을 수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했다. 점점 내 생각을 숨기고, 내 감정을 참는 게 특기가 되어갔다. 엄마가 없어도 슬프지 않은 척, 아빠가 아프게 해도 아무렇지 않은 척. 외로워도 괜찮은 척, 누군가 필요해도 혼자가 편한 척. 사랑받고 싶어도 관심 없는 척, 무섭고 두려워도 밝고 씩씩한 척. 점점 그러다가 다른 사람은 물론 나 자신까지 속이고 살았다. 진짜 내가 괜찮은 줄 알았다. 바꿀 수 없는 건 받아들여야 했고, 참고 견디면 모든 건 지나갔었으니까. 


무시하고 지나쳤던 내 마음은 차곡차곡 쌓여갔고, 결국 삼십 대 마지막 해에 곪아 터져버렸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괜찮지 않았고, 내 마음은 아픔투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매일 밤 혼자 울었다. 영화를 보며 울고, 음악을 들으며 울고, 글을 쓰며 울었다. 삶의 파편들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되어 가슴을 갈기갈기 찢었다. 괜찮지 않았는데 괜찮은 척했던 마음들이 자기를 알아달라며 울며불며 발버둥을 쳤다. 눌렀던 감정들이 내 뺨을 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왜 나를 모른 척했냐고, 왜 내 마음인데 존중해주지 않았냐고.


어른이 되고서야 후회했다.

"나도 시장 바닥에 드러누워 땡깡 부려볼걸."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지 말고 나도 속상할 때 큰 소리로 엉엉 울어볼걸."

"화내고 짜증 내고 떼도 써볼걸."


있는 그대로의 나는 보이지 못하고, 보여야 하는 나로만 살아왔으니 내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며 살아가는 것조차 한 걸음씩 노력해야 하는 숙제가 되어버렸다. 삶의 고통과 역경은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주지 못했다. 견디는 게 많아지고, 넘어서는 게 익숙해진다고 결코 어른이 되는 게 아니었다. 철든 아이, 현명한 어른으로 보였지만 그 속에는 자신으로 표현되지 못해 꽁꽁 얼어버린 유약한 영혼이 겨우 서 있었다. 어른이 된 나에게 진짜 필요한 건 흔들리지 않는 거창함이 아니었다. 어떤 모습의 나도 받아들일 수 있는 따스함, 어떤 모습의 나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는 부드러움, 그런 자연스러운 나와 동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 다정함. 그게 진짜 어른으로서 필요한 삶의 태도이고 내 삶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용기다. 


겹겹이 쌓인 나이테를 품고 있는 커다란 나무가 오늘도 제 몫의 바람을 견디는 것처럼, 어린 시절의 나도 어른이 된 지금의 나도 내 몸과 부딪히는 만큼의 삶을 견디며 산다. 마음은 모두 새싹이었던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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