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글방 수강생 김저니의 글
이번 과거도 예상대로 낙방이었다. 두 해 걸러 한 번, 세 번을 시도했으나 장원은 커녕 말석에조차 들지 못하였다. 마음같아서는 산천유람이라도 다니고 싶었으나, 노자路資가 빠듯하여 다시 스무 날을 족히 걸어 고향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의 말대로 그저 공부가 부족한 탓이었을까? 아니면, 시험 전일에 만난 다른 과객科客의 말처럼 외딴 고을에서 홀로 경전을 외는 식으로는 문제를 내는 당상관堂上官의 의중을 떠 볼 수 없어서였는가? 여러 생각을 떨치다 사흘째에 이르러 길을 잘못 들어 다른 마을에 들어섰다. 관아가 있는 고을이라 들었는데, 과연 있긴 했다. 주춧돌만 남은 옛 관아가.
해가 저물고 거리에 인적이 드물었는데, 문득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 따라가 보니 비좁은 골목 사이에 주막이 하나 보였다. 오늘은 여기서 쉬면서 길을 다시 물어보면 될 것이라 여겼다. 목을 축이고 싶었다.
“이보시오, 여기 탁주 한 병만 주시오.”
마루에 앉아 봇짐을 내려놓고 술을 청했다. 마당에는 더러 멍석을 깔고 소반 앞에 둘러앉아 사발을 부딛치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른 멍석들은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문득 천장을 쳐다보니 들보에 매달린 수레바퀴가 하나 보였다. 낡았으나 호화로운 것이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과객이시구려. 맞소?”
수염이며 상투가 희끗희끗한 주인장이 술상을 들고 오면서 물어보았다.
“그렇소.”
“이 고을에 다시 과객이 지나갈 줄은 몰랐소. 젊은 처사處士가 고생이 많으시구려.”
길 잘못 든 객을 처음 보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가 불손했다. 이런 곳에서 반상班常의 구별이 다 무엇인가 싶어서 잠자코 있었지만 주인장의 말꼬리에는 거슬리는 바가 있었다. 마당에서는 이따금씩 주인장을 찾는 소리가 들려오고, 주인장은 멍석 사이를 오가면서 술을 날라 주다가 가끔 주저앉아서 한참을 떠들고는 했다.
“이보시오 주인장, 그런데 저 수레바퀴는 무엇이오?”
“지난 경신년의 일이올시다.”
“뭐라 하시었소?”
“지난 경신년의 일로 내가 모셔 둔 것이오.”
“주인장, 나는 이 고을에 처음 들르는데, 그렇게 말씀하면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겠소이까?”
“소문이야 수십년간 파다하였잖소. 아마도 처사께서 아시는 게 맞을 것이외다.”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기왕 물어본 김에 끝까지 듣고 싶었다. 과거도 낙방한 마당에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들으면 신세가 잠깐은 잊혀지겠거니 했다. 마치 항렬行列이 높은 이를 대하듯 말꼬리를 구부렸다.
“내 과연 풍문으로만 들었소. 허나 소생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올시다. 자초지종을 말해 주실 수 있으시겠소?”
“물론이올시다. 술맛이 떨어지는 이야기이긴 할 게요. 특히 처사께서 정말로 과객이라면 말이오. 허나 원한다면 내가 보고 들은 대로 말해 드리겠소.”
“좋소이다.”
전해들은 바는 있었다. 수 년간 흉년이 계속되었고, 어느 날 폭도들이 현의 관아를 습격하여 곳간에서 곡식을 훔치고 관아를 불태웠으며, 소식을 들은 목사牧使가 군사들을 보냈지만 주모자를 잡지는 못했었다고 들었다. 한편 마당에 앉은 사람들이 갑자기 말을 꺼리거나 눈을 흘기는 듯했다.
“처사께서 들은 대로 수 년간 흉년이 들었고, 이 근처에는 동냥거리를 찾아온 떠돌이들이 가득했소. 보고 온 대로 옛 관아가 바로 앞에 있었으니 관곡官穀 따위를 바랄 수 있지 않았겠소?”
“그럴 법도 하오만…”
산과 들에 나가 힘써 스스로를 구제하려 들지도 않은 채 그저 관官에 매달린단 말인가. 과연 옛 시절에도 다르지 않았구나.
“그래서 벼슬아치들이 등청하거나 할 때면 실랑이가 끊이질 않았다오. 떠돌이들은 구걸을 하려고 몰려드는데, 벼슬아치는 바퀴 달린 가마를 타고 다니니 걸어서 지나다니는 것보다 더 넓은 길이 필요하지 않겠소? 그래서 군사들이 창대나 몽둥이 따위를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면서 길을 열고는 했소. 그 날도 그런 광경이었소. 늘 그렇듯 운 없는 거지 몇 명이 두들겨 맞고 밀려나고는 했지. 그런데 말이오, 그 날은 벼슬아치가 갑자기 멈추라고 하더군.”
“무엇 때문에 말이오?”
“돌아보니 길 한가운데에 왕사마귀 한 마리가 서 있었소. 나중에 다른 과객에게 들으니 그게 바로 당랑거철螳螂拒轍의 고사라고 합디다.”
이는 제齊나라 장공莊公의 옛 일이거늘, 이 늙은이가 갑자기 왜.
“그저 고사에 불과한 일이 또 일어나다니, 날더러 그걸 믿으라는 말이오?”
“실로 그랬소. 그 벼슬아치는 스스로가 무슨 나라 이공인지 장공인지 아무튼 그거라도 되는 줄 알았던 게요. 그러자 좀전에 걷어채였던 거지 중에 하나가 성큼성큼 가마 앞을 막아서고 따지고 들었소이다. 사람은 걷어차더니 사마귀는 피해 가려는 걸 보니 영감께서는 사람보다 이 사마귀를 섬기시는 모양이시구려, 하더니 맨발로 그 사마귀를 밟아 버리더군.”
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자가 아닌가,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점차 이야기를 듣고 있기가 거북해졌다.
“그리하여 가마꾼들과 시비가 붙더니 그 옆에 섰던 군사 둘이 대뜸 방망이를 휘둘러 그 거지를 매질했소. 거지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게 될 때까지 벼슬아치는 허공을 보고 헛기침만 하더군. 보통은 그쯤 하면 되었다며 매질을 그만두게 하고 좌우에 벌벌 떨며 엎드린 사람들을 본 체 만 체 하며 지나가 버리고는 했소이다. 그런데 그 날은 달랐다오.”
“그 가운데 관아를 부순 수괴와 그 패거리가 있기라도 했다는 말이오?”
순간 주인장은 마룻바닥을 탁 치면서, 흉중胸中에 품은 것을 토해내기라도 하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허, 지금 수괴라 하시었소? 그 날 수괴 같은 건 없었소이다. 애시당초 그런 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오?”
“대... 대체 지금 무슨 망령된 소리를 하는 게요?”
“이보시오 처사. 처사께서는 듣기로 청하였으니 가만히 잘 들으시오. 내 직접 지켜본 눈으로 말하는 것이외다.”
과연 그 눈빛이 흉흉하였다.
“매질이 끝날 즈음 빌어먹던 이들 중에 누군가가 벼슬아치에게 돌을 던졌소. 그 돌은 보기 좋게 관자놀이에 맞아서 벼슬아치는 가마에서 떨어지고 말았지. 가마꾼들과 군사들이 황망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일어선 사람들이었소. 약간 떨어진 곳에서 “관아로 갑시다!” 라고 누군가 외치더군. 일어선 사람들이 달려들어 가마를 때려부수더니, 어느새 벼슬아치와 가마꾼들과 군사들은 사람들 사이에 묻혀서 보이지 않았소.”
주인장은 내 허락도 없이 병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랬소.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오. 다들 하나같이 화가 나서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관아로 곧장 몰려갔었소. 관아 문을 부수고는 등청해 있던 다른 자들과 사또를 끌어내어 매질하고 가두었소. 누군가 곳간을 열었는데,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거지 꼴을 한 이들이 아귀처럼 몰려들어서는 저마다 해진 저고리를 뒤집어 곡식을 담아갔소. 그러기를 한 시진時辰쯤 하였을까, 별안간 관아 북쪽에서부터 불길이 일었소. 불을 끄려는 자는 없었고, 뭇 사람이 몰려들어서 불타는 관아를 구경했소. 그런데 불이 거의 꺼져 가고 소란이 정리될 무렵에 갑옷 입고 말 탄 군사들이 몰려왔소이다. 그 정도로 정예한 군사들이라면 필시 목사나 관찰사觀察使가 보냈었던 게지. 자. 기껏해야 몽둥이나 돌멩이를 든 이들이 철기鐵騎 앞에서 대체 무얼 할 수 있었겠소?”
저 말을 마친 뒤 주인장은 얼마간 침묵하고 있었다. 철기가 몰려왔다면 필시 폭도들은 어육魚肉이 되었을 것이고, 혹 살아남은 자들은 관과 조정朝廷에 잠시 원한을 품기도 할 것이었다. 허나 이것이 과연 수십 년간 잊지 않고 이를 갈 일이었는가?
“그럼... 저 수레바퀴는 사마귀 앞에서 행차를 멈춘 관리가 탔던 그 가마의 것이오?”
“아니올시다. 그 날 가마와 수레가 한 대만 부서진 게 아니었소. 다음날 군사들이 물러가고, 숨어 있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돌아왔을 때 비슷한 것을 하나 주워왔을 뿐이오. 다들 쓰러진 사람들 가운데서 값나가는 물건들이나 잃어버린 식구를 찾았지,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소.”
“그렇다면 이 바퀴는 허깨비에 불과하지 않소?”
“아니오. 여전히 그 날의 수레바퀴잖소.”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혓바닥으로 화를 부를 것 같으면서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가 아니라면 대체 저 물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게요? 이해할 수 없소. 주인장은 언제까지 저 수레바퀴처럼 옛 일에 매달려 있을 참이오? 그저 이렇게 구석자리에서 늙어가는 것뿐이지 않소이까?”
순간 정적이 흐르고 모두가 나를 돌아보았다. 크게 실언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인장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저 늙어가는 게 아니오.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외다.”
작가 김저니
다른 종류의 글쓰기로 먹고 삽니다. 간혹 사진을 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