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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글방 Jun 29. 2022

기억하는 어느 날의 해변

하마글방 섹슈얼리티반 수강생 김레이의 글

네가 해변가를 걸으며 했던 이야기를 기억해. 지금으로부터 몇 년 뒤의 일이야. 우리는 여전히 젊었고 아름다웠고, 맨발이었지. 나는 치렁치렁한 곱슬머리가 소금바람에 헝클어지지 않도록 느슨하게 묶어 놓고, 너는 내가 가장 좋아한 푸른색 셔츠를 입고 바지를 종아리까지 걷어 두었어. 나는 언제나 바다에 다시 오고 싶었지. 그러나 항상 너와 오고 싶었어. 이 해변에 같이 오게 되어 기뻐했던 기억이 나. 


행운에 감사하게도 오늘 이 해변엔 사람이 많지 않아. 시끄러운 소음이나 음악도 없고, 오직 파도와 바람소리가 이 공간을 보호하고 있어. 우리는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걸어. 갈 길 없던 내 오른손이 네 왼손을 쥐고 있는 감각을 느끼며, 나는 새삼 안심하겠지. 우리가 처음 알게 된 것은 수년 전의 일이지만, 서로를 발견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지. 그때부터 나는 언제나 네 몸을 꼭 닮아 희고 길쭉한 손을, 마냥 고와 보이지만 잘 보면 굳은 살이 여기 저기 배긴 단단한 손을 참 좋아했어. 네 분야에서 많은 놀라운 것들을 해내고, 또 같이 있을 때 나를 즐겁게 해주었던 그 섬세한 손 말이야.


해가 점점 커지고 빛이 노랗게 변하기 시작해. 한참 걷다가, 너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지. 그러고는 내 손을 좀 더 꼭 쥐고 물가로 가. 나는 저항감 없이 네가 이끄는 방향으로 가지. 그것은 내가 너를 마음 깊이 믿고 있기 때문이야. 잠시동안 나는 네가 어깨에 두른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몇 장 찍는 것을 봐.  “잠시 혼자서만 걸어 볼래?”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사진을 찍기 위해 네가 곁에서 멀어지는 것을 한동안 바라봐. 곧 너는 나와 반대 방향으로 멀찍이 향해가며 점처럼 작아져. 이제 나는 앞으로 걷고 있어. 한사람만의 발자국이 물기 어린 모래사장에 그려지고 있었지. 어느새 내 시야에서 사라진 네가 다시 보고 싶어서, 나는 우뚝 멈춰 섰어. 같이 걸을 때는 잔잔하고 아름답던 파도의 노래가 지금은 커다랗고 잔인하도록 차갑게 들렸지. 그때 네가 다시 내 이름을 불러. 너는 다시 내 시야 안으로 돌아오고, 혼자 해변을 걷는 나의 족적이 참 멋진 선을 그리고 있었노라고 알려줘. 


오늘이 지기 전 마지막 태양 앞에, 우리는 발목까지 잠기는 얕은 물가에 서서 파도가 움직이는 것을 오래도록 봐. 노란빛이 주황색에 가까워질 때까지. 간혹 높은 파도에 우리가 걸어오면서 남긴 발자국이 쓸려 지위지기도 해. 여러 번의 간의 관찰 끝에 나는 결론 지었어. 부드럽고 고운 모래사장에 찍힌 두사람의 발자국은 파도에 결국 매번 지워지고 말아. 발자국 몇 개나 살아남을까? 그걸 보고서 나는 약간 슬퍼지겠지. 나는 너에게 이것을 말해. 잠깐 고민했을까, 너는 아까 찍어두었던 사진들을 하나씩 천천히 보여주고는, 우리가 같이 남긴 모든 발자국과 궤적이 여기 남아있을 것이라고 답해. 그러곤 너 다운 방식으로 상냥하게 나를 끌어안고 이마에 천천히 입맞추겠지. 


“언젠가는 잊고 싶어?”


대답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뜻을 알 수 있는 사이라 다행이야. 나는 너의 맑은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역삼각형으로 잘 조형된 턱과 볼을 쓰다듬어. 너는 그런 나를 바라보고. 그때 내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진정으로 환한 웃음이었어. 우리는 다시 키스하고, 한때 그랬던 것처럼 애타게 서로를 찾아. 


우리의 과거와 미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완성돼. 네가 가장 좋아하던 내 초록색 원피스의 끈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릴 때, 나는 마음 속에 가득 찬 행복을 감지하고 바닷바람과 함께 너의 체취를 들이마시면서 생각해. 너는 우리가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할 것이라고 했지. 


작가 김레이

자주 뒤돌아 보는 사람. 경계 안에 살며 자기만의 방을 찾아가는 미디어 노동자입니다. lailonvai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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