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피 Jul 25. 2022

오늘날의 추앙



“날 추앙해요.”

여러 번 곱씹어봐도, 종편 드라마의 주연 배우가 내뱉을 법한 문장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중세시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고전문학 속의 대사라면 모를까.


일상에서 위화감 없이 문어체를 구사하는 남자를 본 적이 있다. 시인도 아닌데 그랬다. 그와의 카카오톡 대화창에 ‘기탄없이’ 같은 표현이 찍힐 때면 가벼운 소름이 돋았다. 추앙, 기탄없이, 오롯이, 실없이… 같은 묵직한 단어들은 종이 위에서만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해방일지>가 회를 거듭할수록 추앙은 꼭 맞는 단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염미정과 구씨가 공유하는 세계에서 추앙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맺고 있는 특수한 이해관계 때문이다. 두 사람의 이해관계는 심플하다. 상대방을 무조건적으로 응원하는 것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사랑. 흔할 것 같지만 드물다. 무조건적인 응원이 어려운 이유는, 새로운 관계로 진입하는 문턱에서 조건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인 어른의 매커니즘 때문이다. 외모나 재산 같은 조건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이 사랑에 뛰어들어도 상처받지 않을 조건, 타인을 응원하는 데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의 조건, 그럼으로써 내가 얻을 수 있을 감정적 보상들에 대한 조건…. 이렇게 복잡한 조건들 앞에서 우리는 차라리 주저앉아 안전하기를 택한다.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묻는 구씨에게 염미정은 대답한다.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염미정이 마지막으로 추앙받았던 때가 언제일지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가만히 손가락을 빠는 일 밖에 없었던 유년기의 내게 사랑을 퍼다줬던 외할머니를 종종 떠올린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내 마음 속 햇볕이 내리쬐는 작은 밭은 그녀의 사랑을 거름으로 삼고 있다고 믿는다. 이십 년도 훌쩍 지난 시절의 기억이 누군가를 살게 하고 있다.


부모와 조부모로부터 떠나온 우리는 이제 어른과 어른의 만남이 마냥 순탄할 수만은 없다는 걸 안다. 그러한 앎은 우리를 방어적으로 만든다. 얻을 것보다 잃지 않을 것들에 집중하게 한다. 이십대의 연애에서 숱한 패배감을 겪은 나는 사랑 따위에, 즉 투자 대비 효용이 보장되지 않는 고위험 상품군에 에너지를 쓰지 않겠다는 어설픈 다짐과 함께 삼십대를 맞이했다.


방어적인 결심이 대부분 그렇듯 그 다짐 또한 무너지기 위해 수립된 것임에 다름없었다. 어느새 나는 새로운 사랑 앞에서 신입의 마음으로 임하고 있었다. 사랑에는 경력직 따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말이다.


삼십 년 인생을 돌아보면 최고로 좋은 것들은 대개 사랑에서 왔다. 이리저리 부정해보고 싶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혼자 버텨내기에 일상은 형벌처럼 긴 것이었고, 축제 같은 날은 가뭄의 비처럼 드물었다. <나의 해방일지>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지리멸렬한 삶에 빛이 스며드는 유일한 순간은 사랑을 하거나 사랑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때다. 기약 없는 짝사랑조차도 얼굴에 화색이 돌고 내일을 기대하게 만든다.


염미정과 구씨의 조건 없는 추앙이 영원할 수 있느냐는 물음은 유효하지 않다. 영원까지 바라기엔 세상이 갈수록 불확실해지고 수명은 한없이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계절이 한바퀴를 도는 찰나 같은 시절 동안이라도 누군가에게 확고한 응원을 받아본 사람, 누군가를 확고하게 응원해본 사람에겐 앞으로의 계절을 살아낼 힘이 생긴다. 어쩌면 추앙이란 대체 가능한 사랑이 난무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결국 평범하지 않은 어떤 삶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