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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shirley Mar 07. 2024

9. 처음 마주한 불안장애, 나 이대로 괜찮을까

-지푸라기 붙잡는 심정으로 첫 텍스트 상담받기

그날은 정말 평범한 날이었다.

과제를 하기 위해 오프를 빼두어 집에서 온종일 과제만 할 계획이었고, 조금씩 쌀쌀해지는 날씨가 가을로 접어듬을 알리던 호주에서의 5월 그 어느쯤이었다.


과제에 한참 집중하려고 마음을 먹고 책상에 앉았는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은 채 1시간 내내 한자도 쓰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더니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들이 밀려오더니 순식간에 숨이 막힐 듯이 답답해져서 도저히 책상에 앉아있을 수조차 없어졌다. 대체 이 불안감들은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 봤는데 최근에 내게 일어난 일들로 인해 생긴 부정적 감정들이 영향을 끼쳤던거 같았다.  


먼저 이사한 지 한 달 만에 또 집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 생겼고, 또다시 어떻게 집을 구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즈음 연애 역시 이 사람과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고, 연애초반과는 다르게 눈에 띄게 달라진 태도에 서운함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언제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이 늘 있었다. 그 와중에 이번 학기 수업은 공부해야 할 양도 엄청났고, 과제 역시 너무나 난이도가 높아서 이걸 pass 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저번 학기에 집을 구하느라 과제에 거의 집중하지 못해서 fail을 겨우 면한 과목 때문에 맘고생을 심하게 했던 터라 더더욱 두려움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방학 내내 주 6일씩 계속 일만 하느라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잠잠했던 위경련이 찾아와 밤잠을 설쳤던 터라 건강에 대한 염려도 겹쳐왔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일단 급한 불을 꺼야겠다는 마음에 유튜브에 명상 영상을 검색했다. 그중 ‘눈을 감고 부정적 감정을 날려버리는 명상’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시선을 끌었다. 지금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혀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 생각은 현실이 아닌 허상이니까 괴로워하지 말라는 가이드 내레이션에 갑자기 눈물이 났다. 10분 남짓을 그렇게 마음을 겨우 가라앉혔지만 이 불안감들이 또 올라올 것이라는 건 분명했다.


오히려 바쁘게 일하고 학교 수업을 들을 때면 느끼지 못했던 불안감들이 쉬는 날이 되면 무기력과 함께 어김없이 찾아왔다. 몇 번이고 이유 없이 울음이 터졌고, 더 이상 못하겠다고, 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습관처럼 내뱉었다. 정말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포기할 용기조차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소개해준 상담어플이 떠올랐고, 절박하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날 당일 텍스트 상담을 신청했다.



텍스트 상담은 50분 남짓이었고, 짧은 시간인만큼 내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기 쉽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고 오픈할 수 있는 부분도 한정적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이 상담이 내게 의미가 있었던 건, 처음으로 힘든 상황에서 상담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가족인 동생이나 친한 친구들에게 고민 상담하던 것과는 다르게 내가 힘들어하는 부분을 객관화시켜서 얘기하다 보니까 내가 왜 힘들어했는지 정리가 되는 점이었다.


상담사분은 내 얘기를 듣더니 내가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내 삶이 없고, 뭔가를 시작하면 반드시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완벽주의 타입이다 보니 타인이나 상황을 원망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게 지금의 불안에 영향을 크게 미친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의식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맞추려고 하다 보면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의 마음은 누가 챙겨주고 있냐는 상담사분의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일단 당장 불안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  다른 사람에게 위로하듯 나한테 괜찮다고 다독여 주라고, 혹여나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몰아칠 때는 괜찮다고 크게 소리 내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부정적인 상황은 언제든 닥칠 수 있지만 그게 내 삶의 전부가 실패했다는 것 아니라고, 모든 상황이 잘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려면 유연함이 필요하다는 게 핵심이었다. 집을 다시 옮겨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과제가 fail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 모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일어나더라도 괜찮다고, 그걸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내가 적지 않은 나이에 해외에서 유학을 결심하고 1년 가까이 지내오고 있는 걸 봤을 때 충분히 강하고 단단함을 가진 사람이니 조금 더 자기 자신을 믿고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불안과 불안이 가중된 상황에서 나 자신을 탓하지 말고 조금 더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포커스를 맞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앞으로의 삶을 응원한다며 상담을 마무리지었다.



언젠가 나도 나처럼 마음의 힘듦을 겪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사회복지를 공부하겠다고 결심한 계기였고, 그러기 위해선 내가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호주 유학을 결정했을 때 성취해야 할 목표는 분명했고, 걱정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는 증명을, 그리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한 인간관계에서 항상 상대방에게 맞춰주는 편이었던 나는 기분이 상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해도 싫은 소리를 잘하지 못했다. 갈등을 원치 않아 매번 참고 삭혔다. 하지만 그건 결국 내게 독이자 나를 향한 화살이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걸까, 항상 내 탓을 하기 바빴다. 늘 좋은 사람이고 싶은 강박 역시 나를 죽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일과 학업, 연애를 비롯한 인간관계를 제대로 해내고 싶었다. 집을 수없이 옮겨 다니면서도 이를 악물고 버텨냈던 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가는 실패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절대 실패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 결국 불안으로 이어져 나를 괴롭히고 있었고, 그동안 타인의 판단과 기대를 의식한 나머지 정작 나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안은 언제고 내게 또 다가와서 속삭이겠지.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좀 실패해도 괜찮고 돌아가도 인생의 끝이 아니기에, 나 자신만은 나를 믿어주고 아껴주기로, 그렇게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느려도 꾸준히 매일매일 단단해지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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