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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Nov 09. 2022

몇 분 몇 초를 위해서

  다시, 다시. 거길 그렇게 치라고 했니?


  피아노를 배우면서 가장 많이 배운 단어는 단연 ‘다시’일 것이다. 꼼짝 없이 선생님이 원하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다시 피아노를 두드렸다. ‘다시’에 담긴 의미는 단 하나다. 정답을 피아노로 외쳐. 예술에 정답은 없다고 했지만 그 말은 틀린 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시’라는 단어가 생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정답을 외쳐야만 하는 실기고사장에서 오답만 주구장창 연주한 적이 있다. 거기엔 ‘다시’라는 것도 없다. 아니, 1년 뒤, 몇 년 뒤면 다시 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곳에서 오답을 연주하고, 스스로도 그것이 오답임을 알았고 그래서 할 수 있는 건 애꿎은 피아노에 화풀이 하는 것 밖에 없었다. 심사위원의 종이 울리기 전까지 나는 피아노를 때리듯이 쳤고, 무대에서 내려오고 나서는 다시는 피아노를 치지 않겠다며 목 놓아 울었다.


  몇 분 몇 초를 위해 몇 년을 연습한 곡이었다. 그곳에서 공황장애가 터져 한 순간에 무너질 줄은 몰랐다. 비상약이 있었지만, 처음 받은 비상약을 먹으면 졸릴 수 있다는 소리에 겁 먹어 비상약조차 먹지 못했다. 그렇게 무대 위에서 울어야만 했다. 앞에 있는 아이가 잘 치는 것에 압박을 느껴서, 공황장애가 있는 게 억울해서. 왜 내가 가고 싶은 학교에서야 공황장애가 터진 걸까. 다른 곳에서 터질 수 있었잖아. 아, 정말 피아노 치기 싫어. 피아노가 치기 너무 싫었다. 몇 달 동안 피아노를 쉬었다. 하루이틀만 쉬어도 손이 굳는다며 매일 연습해야한다는 강박을 깨고 피아노를 쉬었다. '다시'가 없는 무대 위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함. 차라리 '다시'가 있는 레슨실이 나았다. 틀린다면 레슨실에서 틀리는 게 차라리 나았다. 거기서 틀린 건 점수에 반영되는 게 아니니까.


  그랬던 내가 다시 피아노를 잡고 똑같은 연습실을 지나 똑같은 실기고사장 위에 올랐다. 반수를 한 것이다. 처음에는 뭔가에 홀린 듯이 움직였다. 다시 그 학교가 가고 싶어졌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충해도 붙을 것 같았고 실제로 대충했다. 시간이 지나고 자신감이 떨어졌다. ‘다시, 다시!’ 다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탓이었다. 실력이 늘고 있는 게 맞을까, 이대로면 떨어지고 다니던 학교로 복귀해야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실기고사가 다가오는 날, 선생님은 더 이상 코멘트할 게 없다고 하셨다. 완전 합격권은 아닌데 그렇다고 불합격할 정도도 아니라고. 다시 칠 정도는 아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 결과는 예비 8번이었다. 내 노력은 ‘다시’를 듣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주치의가 그랬다. “트라우마를 극복했네요.” 피아노를 더 이상 치지 않을 만큼 충격이었던 사건을, 그 사건이 일어난 자리에서 똑같이 연주를 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말씀해주셨다.


  종종 넘어질 때가 생긴다. 피아노가 아니더라도 세상엔 넘어질 일이 너무 많다. 그럴 때면 나는 마음 속으로 '다시'를 외친다. 다시 하면 되니까. 포기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다시 하면 뭔가 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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