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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Dec 13. 2022

반송불요

  편지의 속성에 대해 생각한다. 편지는 느리고, 농축되어 있고, 정제되어 있다. 느린 탓에 생각해보며 한 자 한 자 눌러 담을 수 있고 그렇기에 감정은 농축되고, 표현은 정제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편지를 받으면 마음이 충족된다. 느린 시간 속에 상대가 정성으로 썼을 걸 알기 때문이다. 반대로 편지를 쓸 때는 어떨까? 외로울까? 나는 그 반대였던 것 같다. 외롭지 않은 느낌이었다. 상대가 옆에 앉아 있는 느낌. 답장이 없을 편지여도 쓰는 내내 외롭지 않은 건 그동안 대상이 내 옆에 앉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대상을 상상으로 불러내어 내 옆에 앉히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편지 쓰기니까.

  내 편지에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아이가 엄마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아주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편지인지, 보낼 수 없으니 일기인지, 구분할 수 없을 나의 재미없는 일상으로 가득 채워놨다. 당신의 반응을 볼 수 없는 탓이다. 당신에게 이 편지를 보낼 수는 없으니까. 반응이 적은 사람 앞에서는 무슨 말이든 다 하게 되는 것처럼 당신이 아무 말도 없으니 이야기가 길어지고 사소하게 되었다. 침묵은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 같다.

  오늘은 오랜만에 피아노를 연습했다. 당신 앞에서 연주하던 피아노가 가끔 생각난다. 작곡해준 곡은 가끔 연주되고 있을지, 악보는 그대로 잘 있는지 궁금하다. 모나미 볼펜으로만 써서 화이트가 덕지덕지 묻은 그 악보. 먼 훗날에 당신을 그리워할 나를 위로하기 위한 곡이었다. 그러니 연주는 내가 하는 게 맞는 걸까?

  당신은 아주 바쁘게 살고 있을 것 같다. 설령 내 연락이 닿더라도 답장 한 통 보내주지 못할 만큼, 내 생각이 날 틈도 없이 아주 바쁘게. 원래 그런 것이다. 시간 많고 여유 많은 사람이 잡생각하면서 지나간 인연 그리워하는 것이다. 바쁜 사람은 잡생각 할 시간도, 과거를 되짚어볼 여유도 없으니까. 그래도 나는 괜찮다. 편지가 있어서. 말했잖나. 대상을 상상으로 불러내어 옆에 앉히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편지 쓰기라고.

  그러니까 나는 아주 외롭지 않다. 가끔 당신 생각이 나면 펜을 들어 편지를 쓰면 되니까. 상상 속의 당신은 진짜 당신은 아니지만, 당신은 가만히 앉아만 있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당신을 더 이상 볼 수는 없으니 당신의 모습이라도 불러내는 이 의식으로 나는 당신을 느낄 수 있다. 설령 지금의 모습과 상상 속의 당신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대도,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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