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쉬기로 했다. 주치의는 내가 단편적인 기억만 꺼내고 그 이상 들어가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도 동의했다. 상담실에서 울어본 게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왜 그런 것 같냐고 마지막 질문을 한 주치의에게 나는 말했다.
“글쎄요, 저는 이제 행복해요.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상담할 때는 불행했던 과거를 자꾸 떠올려야 하잖아요. 떠올리면 지금의 행복이 깨어질 것 같아서 두려워요.”
애인은 내게 말했다. 네가 소설을 써서 다행이야. 그동안은 다른 사람의 삶은 이해하려 하지 않던 네가 이제는 소설을 쓰며 다른 선택을 존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상상을 하면서 더 행복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지만 이건 단편적인 모습에 불과하다. 나는 소설을 쓰면서 다른 선택을 존중하고 그로 인해 행복을 배우는 게 아니라, 불행해지고 싶지 않아서 나만의 세계를 구축한 것에 더 가깝다. 내 소설은 모두 희망차다. 난 우울한 사람이었는데도. 그건 모두 나를 눈속임하려고 만든 것이다.
나에게 ‘선생님이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적은 사람의 말이 주술처럼 남는다.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 친구관계도 좋고, 가족과의 관계는 회복세에 접어들었다. 돈이 풍족하지는 않지만 모자라진 않고, 걱정거리도 딱히 없다. 그런데 과거를 들춰서 내게 남는 게 뭔데? 그건 전부 자기연민이다. 나보다 불행한 이들에 대한 기만이다. 모르겠다. 혹자는 ‘어린 시절의 나’도 보듬어야 할 대상이라는데, 나는 보듬기가 싫다. 그게 내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다.
나는 이제 주인공들의 고난을 다룰 줄 모른다. 나는 소설 인물에 나 자신을 대입해서 쓰는 경향이 있어서 주인공들의 고난을 다룰 때 내 과거를 들춰본다. 그러곤 덮어버린다. 쓰고 있는 소설이 있는데 기승전결의 전결을 쓰지 못하겠다. 나의 세계는 부정적인 것이 편집되는 편협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