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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Jan 10. 2024

우주미아 이야기

  요즘은 소설을 쓰고 있다. <펭귄의 목소리>로 상을 받아, 이를 포함하여 <지느러미는 날개를 닮았다>도 지면에 실었고, 계약되지 않은 두 작품은 세상에 나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그 중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미아>라는 작품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미아>를 집필하게 된 계기는 다름이 아니라 내 정체성을 소설로써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다.

  ‘영어 못하면 미국인 자격 박탈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질문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미 국적을 갖고 있음에도 나는 왜 끊임없이 ‘나는 미국인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을까? 아마 주변 사람들 영향이 컸겠지.

  “미국인이면 영어 좀 해 봐.”

  “미국 어디서 살았어? 거긴 어때?”

  이 질문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고 그래서 미국인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알고 있었다. 미국인으로 인정받는 것에 그렇게 목매는 건 사실 한국이 싫어서 택한 대체재라는 걸. 한국의 가족들은 너무 무섭고,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을 많이 했다. 어렵게 썼는데 내가 학대당했다는 소리다. 그러니 나는 한국이 너무 싫었고, 저런 사람들이 되기 싫었는데, 한국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게 싫어서 미국 사람으로만 인정받고 싶었다. 다시 정리하면, 한국에서 나를 안아주는 사람이 없는 게 싫어서, 미국으로 가면 누군가는 나를 안아줄 것 같았다. 그래서 미국인이 되길 택했다.     


  나를 수용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 나라 국적을 포기한 나, 수용해줄 지구인이 없어서 지구를 떠난 인물, 박명규. 이야기는 여기서 출발했다. 나는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는 박명규를 보고 싶었다. 그것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그런 인물을 보고 싶었다.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이라는 게 뭘까. 테세우스의 배라는 역설이 있다. 물을 먹어 상한 나무판자를 새 판자를 넣어 하나하나 바꾸면 한 척의 배의 모양은 그대로 있을 텐데, 기존에 빼낸 상한 나무판자로 새로 배 한 척을 만들면, 그 배 중 어떤 것이 기존의 배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은 변한다. 생물학적으로도 세포는 테세우스의 배처럼 계속 세포가 갈아 끼워진다고 하고(적합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주변 사람들도 영원한 건 아니며, 나 자신의 성격도, 취향도, 취미도 영원히 가는 속성이 없다. 그런데 박명규는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 허상만을 좇다가 영영 길을 잃는 ‘미아’가 되는 건 아닐까?     


  요즘 시대는 핵가족화를 넘어 개인화가 이뤄지고 있다. 타인을 통해 얻는 규범이 언제까지 유효할까. 사실 나는 박명규가 찾는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은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규정된다는 생각이다. 박명규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러니 자신을 품어줄 집단을 찾고 있을 것이다. 그편이 더 쉬우니까. 그런데도,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이라는 이야기를 놓을 수 없는 건, 분명 인간은 사회적으로 규정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에 의해 타인과 상호작용하게 되고, 그래서 수용과 거절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에 대한 장애물이 생겼을 때 그를 몰아내는 힘이 있는 사람은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을 상대할 힘이 생기게 될 것이고, 장애물을 몰아낼 힘이 없는 사람은 수동적으로 자신과 맞는 사람을 찾을 때까지 이 세계를 전전하게 될 것이다. 박명규처럼. 그렇게 ‘미아’가 되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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