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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큥드라이브 Jan 13. 2024

<결혼기념일, 단돈 0원으로 사랑 받는 데이트 코스>

엥뿌삐 부부의 4주년 결혼기념일

기념일에는 여행을 가거나, 비싸고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그래야 인스타그램에 올릴 근사한 사진을 건질 수 있고, 비로소 내가 잘살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 SNS에는 미술관 탐방만 수집하는데도, 괜히 기념일이면 사진을 올리고 싶다. 어차피 남들은 1초 보고 넘길 사진이지만, 젊고 건강할 때 새로운 곳을 온몸으로 저장해 놓고 싶단 말씀.


방학, 그리고 타이밍 좋은 결혼기념일에! 집에만 머무는 상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방학에 뭐했어?’라는 질문에 ‘집에 있었어!’라고 말하는 상황이 너무도 끔찍했다! 아마도 내가 여행이나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느끼지 않았을 것 같은데, 아직 가보고 싶은 곳이 많다 보니 더더욱 슬퍼졌다. 이번 겨울에 영국에서 흥민이도 보고, 파리에서 강인이도 보고 미술관도 부지런히 가는 상상을 했지만, 휴직 사유에 어긋나서 발이 묶였다.


청소의 시작

그 와중에 남편이 난장판인 집을 바라보며, ‘이번 결혼기념일에는 청소를 해볼까?’ 한다.

결혼 4년 동안 매일 나를 폭소케 하여, ‘결혼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으로 내 머리를 가득 채워준, 사랑하는 나의 남편이…감히 청소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다니. 이벤트를 준비해도 모자랄 판에 싸우자는 소리를 곱게도 하는군!!!! 이라고 되뇌며, 마지못해 숨겨져 있던 잡동사니를 거실로 모두 꺼내기 시작했다. 그의 방구 같은 말에도 착실한 행동으로 답했던 이유는, 대청소를 언제 했는지 기억이 없을 정도로 집안이 어지럽긴 했기 때문이다.


4년 동안 손대지 않은 물건을 모두 버리고, 몇 차례 분리수거를 끝낸 뒤 현관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굉장한 상쾌함을 느꼈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기 최적화된 동선으로 가구를 옮겼다. 현관 앞 장식장 위는 밖에 나갈 때 집어 갈 지갑, 핸드크림을 제외하고 모두 정리했다. 물건을 용도 별로 구분하여 자리를 지정하고, 넘치는 신발 상자를 재활용하여 수납함으로 사용했다. 밖에 드러나는 물건들을 차곡차곡 정리하여 수납장에 넣었다. 역시 물건은 감춰야 깔끔해 보인다. 물론 이전에도 감추긴 했다만, 수납장 문을 열면 와르르 쏟아지는 형국이었다. 정리하기 이전의 집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러 가지 못해 슬펐던 마음이, ‘오히려 좋아’로 바뀌기 시작했다.


기념일에 꼭 돈을 많이 써서 화려한 곳에 가야 한다는 나의 욕구는 어디서 왔을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과시하고 싶은 욕구는 결핍에서 오는 것 같다. 평소에는 비싸서 못하니까 기념일이라도 통 크게 돈을 쓰면서 ‘나 잘살고 있어요!’ 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싶은 결핍. 방학을 맞아 모두 놀러 가는데, 나만 제대로 못 노는 것 같단 마음의 결핍. 돌이켜보면 결혼 생활을 잘 꾸려간다는 것과, 화려한 추억을 많이 남긴다는 것은 같은 개념이 아닌데 나는 무의식중에 둘을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앞으로 여행을 가긴 할 거다. 하지만 여행을 가지 않는 방학이라고 해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번 결혼기념일에 생각해본다.


집을 정리하다 보니, 마음에 여유 공간이 생겼다. 기념일의 이유는, 일의 근원을 되새겨보고 미래를 바라보기 위한 것. 이렇게 사는 공간을 때 빼고 광내니까 삶의 의욕이 생긴다. 혹시나 나처럼, 욕구와 다른 기념일로 인해서 속상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청소를 해보세요! + 최근에 청소광 주브라이언의 영향도 컸다. 그동안 더러워서 싸가지 없게 살아왔는데, 2024년에는 싹수 있게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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