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은 모르지만, 쌓이면 티나는 것.
A. 알아주는 기업이다..!
그리고 재단 소유의 미술관을 가지고 있는 기업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메디치 가문은 제약업으로 돈을 벌어 1397년 설립한 은행으로 금융업계에 큰손이 되어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같은 작가들을 후원했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던 오피스는 '우피치 미술관'이 되었다.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은 베르사유궁전이 완성된 후 왕의 보물창고로 쓰이다가 시민들에게 공개되어 세계적인 미술관이 되었다.
석유왕 존 데이비드 록펠러의 손자인 넬슨 록펠러가 1969년 기증한 3,000여 점의 작품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그의 아들 이름을 딴 '마이클 록펠러 윙' 전시관에 있다. 영국의 설탕 사업가였던 헨리 테이트의 소장품 기증으로 '테이트 모던'이 시작되었다. 석유 재벌이었던 장 폴 게티는 1997년 우리나라 여의도 공원의 두 배에 해당하는 크기의 '게티 센터'를 로스앤젤레스에 세웠다.
물론, 마케팅의 일환이다. 대중과 균형을 맞추면서 예술 작품으로 특별함, 차별성,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기 위해 예술을 이용한다고 이야기하는 비평도 있다. 어찌 보면 재단의 입맛에 맞는 작가들을 선정하여 브랜드의 메시지를 있어 보이게 포장하고, 문화예술을 통해 사회에 공헌한다는 좋은 타이틀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민간 재단의 장점은 상당한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되어서 작가의 실험, 연구, 창작 과정에 굉장히 너그럽다.
예를 들면 루이비통 재단은 재단과 미술관을 설립하는 프로젝트에 수억 유로가 들어간다고 하지만, 아르노 회장은 '꿈은 수치화되지 않는다'며 정확한 수치를 발표한 적이 없다. 이들은 '대중에 봉사한다는 사명으로 모든 사람이 예술과 문화에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카를라 펜디 재단은 '예술, 창의성, 과학 및 기술을 장려하기 위한 문화 행사를 기획, 지원한다. 에르메스 재단은 기술과 노하우의 전수, 새로운 예술 작품의 창작, 환경 보호, 연대 활동의 장려를 통해 공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故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랑 자식 빼고 다 바꿔보자!’ 등 다양한 명언을 쏟아내기로도 유명한데, 그가 쓴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경영처럼 그림도 입체적으로 봐야 한다’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기업을 잘 경영하려면 보이지 않는 것을 봐야 한다. 그러려면 ‘입체적 사고’를 해야 한다. 나무 한 그루를 심더라도 숲을 생각하고 숲의 여러 효과와 가치를 생각하는 것처럼, 사물의 본질을 생각하고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앞으로는 기업이 만드는 제품에도 그 기업의 문화와 이미지가 담겨야 한다. 문화적인 경쟁력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문화적 자산이 만들어지면 그 효과는 신제품 몇 개 개발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된다. 21세기는 문화 경쟁의 시대가 될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고, 그들과 소통하며 연대할 수 있다. 작가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 위에서 자기 통찰력과 철학으로 내뱉어낸 것이 작품이다. 자기표현을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면, 이들이 가진 감각을 예시로 내 삶에 끌어와 적용하려는 연습을 시도해 볼 수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이 동료 과학자 로버트 훅에게 보낸 편지에 '내가 더 멀리 봤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이라는 표현을 썼다. 과학기술의 발전에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주 운 좋게, 문명이 축적된 시기에 태어나 인류가 쌓아온 무수한 성공과 실패 그리고 그 과정을 줌 아웃으로 볼 수 있다! 심지어 이런 이야기들은 재밌다.
미술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미술은 왜 배워야 할까?'를 항상 생각한다. 사실 교육과정에 너무나도 상세히 나와 있지만, 조금 더 피부에 와닿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시가 필요하다. 자발적 동기 없이,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아주 매력적인 외적 동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술을 왜 배우나요?'라는 질문에 매번 다른 답변을 하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미술을 배우는 이유를 천천히 다듬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을 향유하는 것은 콘텐츠 과잉의 시대, 원하는 콘텐츠를 음성이나 초성으로 찾는 시대, 그리고 내가 원하는 콘텐츠를 알고리즘이 알아서 찾아주는 시대에 자기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를 곱씹어 보는 것, 내면에 '문제의식'이라는 씨앗을 심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더듬 더듬 찾아가는 것.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예술에서 찾는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 일인가.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상상력을 갖고, 의미를 만드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 미술은 실생활에 당장 적용하여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실용적인 학문은 아니다. 그러나 실용적이지 않다고 버리기엔, 삶의 양분을 흡수할 소중한 기회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 배워야 하나. 나는 먹고 살기 바쁘다’ 라는 생각보다는, ‘바쁘지만, 잠깐의 휴식으로 미술이 건네는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는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하고 싶다.
통찰력은 수치화할 수 없다. “네, 피카소 그림을 봤으니 당신의 심미안과 통찰력은 78% 향상되었습니다”하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런 능력은 단기간에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습관처럼 서서히 길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씨앗을 좋은 땅에 심어도 곧바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는 않는다. 탁월한 통찰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예술 같은 좋은 양분을 충분한 시간을 들여 섭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술의 쓸모>, 강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