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아 정씨 May 07. 2020

독일로 가는 소포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47

5월 6일(격리 52일째) 수요일 맑음


아침부터 우리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독일 처제의 집으로 보내는 소포가 다음 주까지 도착하려면 오늘 준비해서 내일은 부쳐야 한다. 더구나 수요일은 학과 공부가 없는 날이어서 아이들도 세 살 생일을 맞게 될 루이즈의 선물 준비에만 몰두할 수 있다. 처제는 4년 전 독일 남자 시몬과 결혼했다. 장인 장모를 아는 사람들은 사위 둘의 국적이 다양하다고 한 마디씩 한다. 프랑스어 실력이 고만고만한 우리 둘은 꽤 잘 통하는 사이다. 여름휴가 때 처가에서 내가 바비큐 장작을 피우고 있으면, 시몬은 아뻬로 한 잔을 갖다 준다. 우리는 잔을 부딪히고 대화를 이어간다. 축구 보는 것보다는 축구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건 우리 둘의 닮은 점 중 하나다. 시몬과 축구를 떠올리면 2018년 여름 월드컵을 잊을 수 없다. 독일을 2-0으로 이겨버린 그 역사적 경기 말이다. 당시 나는 처가에, 시몬은 독일에 있었는데 경기가 끝나자마자 시몬은 내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다. 문자에 처량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긴 말 하지 않고 그냥 고맙다고만 답했다. 


루이즈는 결혼 이듬해 태어났는데, 하나밖에 없는 동생 아이여서 그런지 아내가 각별하게 챙긴다. 또 나는 루이즈의 대부여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이다. 처제는 우리 둘째의 대모이고, 시몬은 넷째의 대부이다. 우리는 그렇게 얽히고설켜서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다.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섞어가며 말하는 루이즈는 집안의 귀염둥이 역할을, 우리 집의 넷째가 태어나기 전까지 담당했었다. 둘째를 가지려고 노력했던 처제가 몇 번의 실패 끝에 최근 임신하게 됐다. 세 살 생일은 아마도 루이즈가 외동딸로 맞는 마지막 생일이 아닐까. 


아이들은 각자 정성이 담긴 카드를 만들었다. 첫째는 열었을 때 촛불 세 개가 꽂힌 케이크가 나타나는 입체 카드를 만들었고, 둘째는 빨간색 하트가 주르륵 나타나는 입체 카드를 만들었다. 셋째는 생일날의 풍경을 상상해서 그렸다. 루이즈의 세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그 집에 가서 일주일 정도 머물러서인지 그 집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게 눈에 띄었다. 카드가 끝이 아니었다. 올해 우리가 준비한 루이즈의 메인 선물은 동화를 읽어주는 기계, 정도 되는 물건이다. 한국어로는 도저히 찾을 길이 없어 동화책 리더기라고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애플리케이션에 동화를 직접 녹음하고, 스마트폰을 동화책 리더기에 와이파이로 연결시키면 녹음이 리더기로 옮겨간다. 리더기에는 100개 정도의 동화를 저장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엄마 목소리로 녹음된 콩쥐팥쥐, 아빠 목소리로 된 백설공주, 할머니 목소리로 된 신데렐라 등을 들을 수 있다. 인터넷으로 상품을 봤을 때는 아이디어가 훌륭하다고 손가락을 추켜세우는 정도였는데, 직접 기계를 다뤄보니 훨씬 더 그럴듯했다. 아내는 대형마트의 도서 코너에서 우리 가족의 목소리로 녹음할 동화책을 사 왔다. 아내가 마트에 간 것은 격리 이후 처음이었다. 


아내는 전과 다른 마트의 풍경이 너무 낯설어서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마스크 때문에 표정을 알 수 없는 사람들, 계산원과 사이에 놓인 유리벽, 텅텅 비어있는 밀가루 진열대 등이 생경하게 다가왔다고 했다.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피하는 것 같은, 꼭 그래야 할 것만 같은 차가운 분위기였다고 한다. 마트를 자주 다니는 나의 입장에서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 읽은 우엘베크의 글에서 나온 “약간 더 나빠질” 세상이 바로 이런 것일까, 라는 상상을 했다. 


아내가 사 온 동화책에는 총 여덟 개의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아내와 첫째가 녹음하고, 두 번째 이야기는 나와 둘째가 녹음했다.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에는 각종 동물과 효과음 소리 옵션도 추가할 수 있어서 녹음을 끝내고 직접 들어보니 그럴듯했다. 녹음을 하는 아이들도, 우리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안녕 루이즈, 너에게 읽어줄 동화의 제목은 OOO야, 지금부터 잘 들어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엇보다 멀리 사는 가족의 목소리로 아무 때나 동화를 들을 수 있다는 게 루이즈에게는 큰 선물이 될 것 같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우리는 셋째에게 약간 다른 버전의 동화책 리더기를 사주었다. 일종의 쌍방향 동화인데, 아이가 직접 주인공을 고르고, 이야기의 배경을 고르고, 다른 등장인물을 고르고, 소재가 되는 물건을 고르면 동화를 들려준다. 리더기 안에는 총 48가지 동화가 내장돼 있다. 리더기 회사의 홈페이지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얼마든지 다운로드할 수 있다. 물론 유료이다. 셋째가 그 기계에 꽂혀 있을 때는 혼자서 꽤 오랫동안 동화를 들으며 놀기도 한다. 우리는 대체로 산만한 셋째의 집중한 모습을 보면서 오우 선물 잘 골랐군 정말 괜찮은 물건이야, 라고 감탄했는데 이번 루이즈의 선물은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다만 선물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정성이 좀 필요하다는 게 다른 점이다. 선물을 받아 리더기를 켜보고 우리의 목소리를 들은 뒤 기뻐할 루이즈의 얼굴을 떠올리며 우리는 흐뭇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출구전략이 필요할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