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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Mar 15. 2024

괴물

정보의 공백과 왜곡 앞에서 우리는 모두 괴물이 될 수밖에

세계는 늘 옳고 그름을 따지려 든다. 옳은 쪽에 서야지만 정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아지고 행위에 정당성 부여며 그것은 곧 권위가 된다. 그리고 권위를 품은 자들은 새로운 옳음을 생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이성이 지향하고자 하는, 세계의 진리처럼 보일지언정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누가 옳은가"보다는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차라리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질문에 가깝다. 대부분의 중요한 행위들을 우리는 "왜곡"된 형태로 인식하기 때문이며 그 결과는 "우연"의 영역으로 비집고 들어가 인간의 힘으로 이해할 수도, 어찌할 수도 없는 파장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현상을 제대로 "분간"해내기 어렵다. 영화 괴물은 인식의 왜곡이 벌어지는 과정과 그러한 왜곡된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볼 때 벌어지는 비극을 다루며 인간은 결국 제대로 분간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괴물이 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스스로는 선량한 사람으로 행위하지만 타인이 보기에는 괴물에 가깝다. 영화 외부에서 전지적인 시점으로 인물을 바라볼 수 있는 관객들은 감독이 비춰주는 그들의 삶의 맥락을 하나씩 따라가며 정보의 공백을 메워 그들이 왜 타인의 눈에 괴물로 비칠 수밖에 없는지 알아차릴 수 있지만 영화 안의 인물들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들은 타인의 삶을 부분적으로 밖에 인식할 수 없으며 그러한 정보의 공백은 필연적으로 오해 또는 몰이해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타인 앞에 선 괴물이 된다. 서로를 괴물이라 부르지만 자신이 괴물인 것은 알아채지 못한다. 세계는 그렇게 정상인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괴물로서 기능한다. 자신과 다르다고 괴물로 치부해 버린다면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은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 나와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삶의 어느 단면까지 바라볼 수 있느냐에 따라 우리는 같은 사람을 괴물로 바라보기도 하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으로 대하기도 한다. 나와 가까운 사람의 허물에는 비교적 너그럽고 나와 일면식이 없는 타인에 대해서는 칼 같은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전혀 낯선 장면이 아니다. 우리가 한 사람의 어느 단면까지 바라볼 수 있느냐에 따라 한 인간을 그려내는 데 있어 왜곡을 최소화할 수 있다.


영화 괴물은 그렇게 끝없는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서 "타인의 해석", 영화 "컨텍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이 동시에 떠오른다. 세 작품은 같은 주제 의식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인간은 애초에 서로를 이해할 수 없지만 끝없는 소통으로 미약하게나마 그 불협화음을 줄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의 공백과 그로 인한 왜곡 앞에서 우리는 모두 괴물이 될 수밖에, 설령 그것들을 알아차린다고 할지라도 나와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인간에게 영원히 남을 숙명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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