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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Jul 02. 2024

<서평> 배우의 방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담긴 공간, 그리고 인생

근래 읽었던 책 중 가장 몰입감이 좋았다. 타인과의 깊은 교류,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독서와 글쓰기의 가장 큰 목적으로 두고 있는 내 생각과 합치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배우의 방은 열 명의 배우를 인터뷰한 내용을 기록한 인터뷰 모음집이다. 배우들 각각의 소중한 공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인간에 대한 사랑 어린 시선에서 발현된 작업물인 셈이다.


스타트를 박정민이 끊는다. 분당의 한 영화관, 인생 최초로 영화관에서 관람했던 영화 쉬리와 배우가 될 계기가 되어준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모두 이곳에서 관람했다고 말하며 자신의 현재를 열어준 시작점으로서 그의 인생에 자리매김한 장소를 소개한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면 안 된다는 말에 대해 배우 박정민은 답한다. 자신 있게 자신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노라고, 하지만 그 때문에 가장 불안하며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가장 많은 치유를 받노라고. 불안이라는 것은 어떤 상태가 되어도 평생 없앨 수 없는 것이며 자신을 가장 불안하게 하는 것은 연기를 하다가 막힐 때 그럴싸한 요령으로 넘어가려 하는 자신을 느낄 때라고. 크게 동의하는 지점이다. 교사라는 일을 좋아하는 일이거나 천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교사이기 때문에 겪는 불안과 교사이기 때문에 얻는 위안이 동시에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교사로서 삶을 살다가 한계에 봉착할 때 그럴싸한 핑계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자 자기 합리화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괴롭고 자기 혐오감이 든다는 점에서 박정민이 느끼는 불안과 맥을 같이 한다. 배우 박정민은 "가끔씩 이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그저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며 자기 마음에 와닿았던 어느 선배의 조언을 풀어놓는다. "많은 사람 눈에 너는 이미 배우니까 그다음 스텝을 밟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배우로서 뭘 할지를 고민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선배의 말은 그의 고민을 단박에 날려 보낸다. 좋은 선배는 좋은 말을 한다. 좋은 사람 곁에는 좋은 선배가 있다. 무척이나 공감되는 말이다. 나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하곤 했다. 돈도 안 되는 글을 끄적이면서 스스로를 작가라고 부를 수 있는지 존재론적 고민에 휩싸일 때가 많지만 박정민의 선배가 건넨 이야기에 힘입어 이미 쓰고 있는 사람인 이상 무엇을 쓸지 고민하는 것이 더 생산적인 고민이라는 위안을 받는다.


변요한은 스스로 무너져 내린 경험을 한 뒤 복싱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복싱은 안 맞을 수 없는 스포츠구나, 설령 이긴다 해도 결국 맞으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거구나!" 하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변요한. 배우들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관찰하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외부 환경에서 많은 깨달음과 통찰을 얻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배우로서 뿐만 아니라 본인의 인생에도 깊이를 더한다.


동료들을 언급하며 호감의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이제훈에게서 발견되는 건 단순한 동료애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전보다 몰개성화된 한국 영화 산업에서 자기만의 창작욕구를 모색하며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는 또래 친구들을 향한 든든함. 그리고 연대 의식에 가까워 보였다. -196p

생각해 보니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있는 이유는 몰입경험과 연대의식이 아닌가 싶다. 무언가에 빠져 골몰했던 경험,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보낸 동료. 10대 시절 입시를 향해 달렸던 기억도 그렇고 대학시절 춤을 췄던 때도 그랬다. 내가 좋아서, 스스로 목표한 바가 있어서 몰입했던 자신에 대한 기특함도 있지만 그 시간 동안 나와 같은 뜻을 품고 곁에 함께 있었던 친구들에 대한 애틋함 역시 삶을 지탱하는 커다란 한 축이 된다. 몰입과 연대의식, 삶을 곧추세울 두 개의 기둥임에 틀림없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거잖아요. 액션 영화를 찍으면 액션이 많아서 힘들고 액션이 없으면 차라리 몸으로 하는 게 낫다고 하죠. 저는 모든 배우가 같은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에게 있는 핸디캡은 핸디캡이 아니죠. -255p

배우 주지훈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 있다. 그 뒤로 사실 그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인터뷰집을 살펴보니 꽤 생각이 깊고 털털한 면이 있어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매력이 가장 중요한 연예계에서 그는 충분히 잘 팔리는 상품이 될 수 있었겠다. 모두에게 있는 핸디캡은 핸디캡이 아니라는 그의 말은 어떤 일을 하건 자신의 직업관을 정립할 때 반드시 새겨야 할 말이라는 느낌이 든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다. 아이들 때문에 힘들다고 한탄했던 순간들이 부끄러워진다. 말보다 행동으로 사람됨을 판단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라 믿기 때문에 멋진 말 몇 마디에 어느 한 사람에 대한 인식이 쉽사리 바뀌기는 어렵겠으나 오랜 시간 스스로의 행동으로 자신의 말을 증명해 나가며 살아낸다면 어느 순간 정말 멋진 사람으로 대중의 인식에 각인될 수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익어감을 응원한다.


김남길은 만화 애호가다. 특히 슬램덩크를 인생작으로 꼽는데 서태웅 같은 천재 캐릭터보다는 강백호 같은 언더독을 응원한다고 한다. 슬램덩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서태웅, 윤대협, 채치수 등 각자 좋아하는 캐릭터가 확실하지만 주인공인 강백호를 좋아하는 사람이 참 많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이 바닥부터 시작해서 점차 자신의 분야에서 차근차근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으며 성장해 가는 강백호의 모습이 대부분의 우리네의 삶과 겹쳐 보였기 때문은 아닐까. 선덕여왕의 비담으로 유명해진 뒤 드디어 배우가 되었다며 축하해 주던 지인들의 축하인사가 어색했다며 김남길은 말한다. 자신은 미디어를 통해 유명해지기 전 연극을 하던 시절에도 스스로를 배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고. 자기 정체성은 중요하다. 교사이면서 내가 교사로서 자격이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던 나에게, 글 쓰고 책을 몇 권 냈지만 여전히 작가라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길 머뭇거리는 나에게 김남길의 자기 확신은 꽤나 멋져 보였다. 강한 자기 확신은 성공한 뒤에 명성과 함께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결국 무엇인가 돼도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김남길이 꽤 오랫동안 머리에 남을 것 같다.


유태오는 이방인이다. 독일 국적으로 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중국, 태국, 미국 등 세계를 떠돌며 영화와 함께하는 인생을 살아온 그는 이방인으로서 떠돌아다니는 삶이 외롭지 않냐는 질문에 "떠돌아다니는 삶의 외로움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고마운 특권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답한다. 모든 일에 양면성이 있듯 외로운 삶, 결핍이 있는 삶이 갖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알고 있는 것, 느끼고 있는 것을 몸소 경험으로 체득한 다른 누군가가 그의 언어로 나와 같은 생각을 표출할 때 느껴지는 희열이 있다. 유태오는 그렇게 결핍을 오히려 특권 삼아 자신만의 색깔을 더욱 공고히 다져가는 듯 보인다.


배우 오정세는 관찰자다. 인터뷰를 하며 기자가 자신의 팔을 뚫고 들어오는 주사 바늘을 똑바로 응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겁 없는 캐릭터의 영감을 얻는다.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부모님의 가게에서 일을 도우며 손님을 관찰했던 경험은 그가 배우로서 가져야 할 관찰력의 토대가 되었다. 일상을 깊이 들여다보며 자신의 내공을 차곡히 쌓아가는 것, 배우들은 일생동안 관찰, 체화, 발현의 순환을 거치며 어떤 인간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일까. 배우 오정세는 백 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작품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 포트라이트를 받은 스타가 아니라서 그런지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영화와 배역을 대하고 있었다. 비중의 크고 작음보다는 자신이 얼마나 즐겁게 표현할 수 있는지, 얼마큼 도전해보고 싶었던 감정의 결을 가진 역할인지 생각하며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 only one이 되어간다.


고두심은 배우란, 연기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저 살아내는 것이라고 답한다. 자신의 삶과 유리된 어떤 대상이 아니라 연기 자체가 그저 삶의 일부였다고, 연기에 필요한 대사, 장소, 생각을 자신의 삶에 그저 덧씌워 역할이 삶이 되어버린 경지에 이른 셈이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문구가 떠올랐다. "지금의 나는 지나온 날들의 총합이기도 하지만, 선택하지 않고 놓쳐버린 것들의 총합도 지금의 나" -365p

책을 읽다  생각을 마주할 때면 아주 기쁜 마음이 든다. 그런 순간이 또 한 번 찾아왔다. 나의 현재는 지금까지 내 선택의 총합이라는 생각은 흔한 생각이다. 하지만 내가 선택하지 않고 놓쳐버린 것들의 총합도 지금의 나라는 생각은 흔치 않은 생각이다. 우리는 늘 놓쳐버린 것에 대해 후회하지만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때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놓쳐버린 것이 오히려 감사하기도 하다. 현재에 만족할 수 있다면 지나온 모든 시간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설령 그것이 후회와 고통으로 점철된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인터뷰집이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질문하는 방법에 대해 고찰하게 되었다. 특정되는 질문을 던질 때도 있지만 질문이라기보다 평서문에 가까운 독백을 던질 때가 더 많고 그럴 때 인터뷰이의 자유로운 답변이 나온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내공이 있는 배우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테지만 그것은 진한 삶과 보다 깊은 교류를 갈구하는 모든 이들이 꿈꾸는 아름다운 대화였다. 배우란 타인의 삶을 표현하는 직업이라서 그런지 평소 깊은 생각과 고민을 하고 그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내리기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우의 삶을 모르지만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숙한 성숙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 대해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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