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기쁨을 발견할 때
가끔 그런 장소를 발견할 때가 있다. 생각지 못한 기쁨을 주는 곳. 정신이 먼저냐 물질이 먼저냐 하는 아득한 고대 철학의 이념 쟁투에 이번만큼은 물질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만큼 공간이 주는 힘은 위대하다. 소담하고 정갈함을 세심하게 수놓은 카페에서 아늑한 편안함을 느끼기도 하고, 특정 시대의 건축양식이나 인테리어 소품으로 가득 찬 호텔의 로비에서 고풍스러운 느낌을 채우며 시대를 거스르는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때로는 일상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확연히 단정적인 화려함 속에서 놀이동산에 놀러 온 어린아이처럼 잔뜩 마음이 들뜨기도 한다.
약속 시간보다 무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어디 시간 보낼 곳이 없을까 주위를 잠시 서성이다가 약속 장소에서 한 블록 앞 꺾어진 골목에 위치한 작은 도서관을 발견하고 발을 들이밀어 본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포근함과 기쁨을 느낀다.
LP판이 돌아가며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는 내 삶에 묻혀본 적 없는 생소한 소리다. 내 삶과 접점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에 더 쉽게 귀를 기울이곤 하지만 접점이 없다고 하여 그것이 늘 우리의 삶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무런 접점이 없기 때문에 더 쉽게, 더 강렬하게 우리 인생에 어떤 무늬를 남기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LP판 앞에 서서 잠시 눈과 귀를 기울여본다.
입구 맞은편에는 외부로 연결된 작은 문이 하나 있다. 행여나 끼익 소리가 나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방해할세라, 소리가 나지 않도록 손잡이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잔뜩 준 채 문을 조심히 밀어 본다. 세 평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정원에는 아기자기한 인공폭포에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고 그 옆으로 테이블 하나, 의자 두 개가 조용히 놓여있다. 누구든 홀로 와서 잠시 쉬어가라는 듯 주인장이 만들어 둔 고요한 다락방이다. 의자에 앉아 잠시 봄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여본다. 이마에 살짝 땀이 맺힐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문다. 아이들을 위해서인지 지하엔 만화책을 전시해 놓은 공간이 있고 2층에는 자그마한 테이블 두 개와 몇 개의 1인용 소파가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잠시 나의 현실에서 다른 이의 현실로 넘어온 듯한, 어색하면서도 차분한 감정으로 제삼자가 되어 공간을 음미한다. 고요한 공간에는 소란스러운 공간과 다른 종류의 힘이 있다. 시끌벅적한 공간은 에너지를 뿜어내며 나를 최대한 발산토록 하여 신체적인 역동성을 추종케 한다면 아주 고요한 공간은 온 에너지가 정신으로 몰려와 왠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사람이 바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을 대할 때만 활용되는 말이 아니다. 스스로를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약한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어울리는 사람, 거주하는 장소, 하는 일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어제까지 걸어온 발자취에서 벗어나고자 아주 가끔 새로운 환경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 작은 시도를 한다. 일상에서 벗어난 그 작은 부서짐은 순간적으로 마음을 내어줄 어떤 것들과 조우하게 된다. 그렇게 어떤 장소는 순식간에 나의 삶으로 들어오게 되고, 그 순간부터 그곳은 내 마음을 내어준 특별한 장소가 된다.
인간은 어쩌면 끊임없이 마음 줄 곳을 찾아다니는 존재일지 모르겠다. 사람에게, 사람이 아닌 것에게. 사랑받고 싶은 것이 인간이라지만, 사랑을 주고 싶은 것 또한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