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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샤워

고독, 고통, 진실, 생의 의지 같은 것들.

by 정 호
내가 책 한 권씩 선물해 줄게, 읽어봐, 재밌다.

초등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글쓰기 강사로 전향한 한 선배가 모임 중 휴대폰으로 책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초중등 학생들과 다양한 책을 읽고 인문학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는 선배였기에 어떤 이유에서 책을 추천한 것일까 궁금했다. 나는 책을 추천하거나 선물할 때 두 가지 측면에서 책의 가치를 결정한다. 첫 번째는 내 입장에서 좋았던 책을 추천하는 경우다. 감명 깊게 읽었거나,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거나, 문장이 좋았거나, 내 삶과 맞닿아 있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내 안의 어떤 기쁨이 차올랐던 경험을 너도 해봤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것이 책을 건네는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 이유는 주관적 감상은 제거하고 선물 받는 사람 입장에서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는 경우다. 상대의 업과 맞물려 있거나, 현재의 고민거리를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기대되거나, 왠지 그 사람의 결을 생각하니 이 책을 좋아할 것 같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는 철저하게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책을 바라보기 때문에 선물할 책을 고를 때 조금 더 고민이 된다. 선배는 나에게, 우리에게 어떤 이유로 이 책을 선물했던 것일까.


샤워는 청소년 문학이 으레 그러하듯 주인공들의 대화체로 진행되기 때문에 무겁지 않은 듯 읽히지만 그 안에는 삶에 대한 통찰,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어떤 깨달음들이 은연중에 녹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청소년 문학은 어른들에게도 충분히 가치롭다.


부드는 가능성 없는 일에 계속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아늑은 상황을 바꾸려는 어떤 노력도 없이 그저 부끄러워하고만 있었습니다. 87p

소설 샤워에는 두 주인공이 나온다. 부드와 아늑이라는 바퀴벌레가 주인공인데 부드는 샤워기에 갇힌 신세고 아늑은 초고도 비만으로 바퀴벌레 세계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인물이다. 가능성 없는 일에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 부끄러울 때가 있다. 학창 시절 시험 당일이면 꼭 그런 아이들이 있다. 공부를 곧 잘하면서도 시험공부를 하나도 안 했다며 시장 좌판에 깔듯 얄미운 말들을 주욱 펼쳐 늘어놓는 아이들, 그런데 이것이 아이들에게만 발견되는 방어기제는 아니다. 성인들 역시 노력을 기울이는 일을 부끄럽게 여길 때가 있기 때문이다. 노력해도 좋은 결과를 보장받기 어려울 때면 이 방어기제는 더욱 치밀하게 작동한다. "어차피 해도 안 되는 것 뭐 하러 붙잡고 있느냐"는 비난이 두렵기 때문이다. 외부의 비난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것이 정말 어차피 해도 안 될 일일지 모른다는 막연함을 서서히 인정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기 때문이다.


부드는 우연히 한 바퀴벌레가 살충제에 의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본 뒤 본격적으로 죽음에 직면한다. 그리고 '왜?'냐는 질문을 삶에 던지기 시작한다. 자아에 충격을 일으킨 사건은 부드로 하여금 가족을 떠나 유랑하게 만든다. 호기로운 출발이었으나 부드는 자신의 호기심 때문에 샤워기 헤드에 갇혀 버리게 된다. 부드에게 바닥에 떨어져 있던 샤워기 헤드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처럼 보였던 탓이다. 부드는 호기로운 여행자이자 생에 대한 탐구자였으나 때때로 자신의 노력이 부질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끔찍한 대신 배우는 것도 있지. 사람들이 샤워를 하며 몸을 깨끗이 하는 동안, 나는 죽음이 뭔지 예습하게 되니까. 나는 정말 수없이 정신을 잃고 까무러치곤 했어. 까무러칠 때는 항상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싶지. 그런데 정말 웃긴 건, 나는 매번 어떻게든 다시 깨어났고, 그때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야. 또다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올 게 뻔했지만, 산다는 건 늘 기쁘고 다행스러웠지. 101p

삶에 대한 통찰. 샤워기 헤드에 갇힌 바퀴벌레라는 상황 설정을 통해 생과 삶의 의미를 너무 무겁지 않고 재미나게 전달한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을 지켜볼 때 정말 마음의 힘이 크다는 것을 느낀다. 샤워의 주인공 부드와 넷플릭스 올드 가드에 꾸인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지만 그들의 대응 방식은 전혀 다르다. 부드는 희망을 놓지 않지만 꾸인은 악의 화신이 된다. 그래서일까, 이야기 속에서 고통과 시련은 인간의 본질을 들춰내기 가장 좋은 도구로 활용된다. 청소년 문학은 어쩌면 어른들을 위한 접근하기 쉬운 인문학인지도 모른다.


이제 여기서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별로 안 들어. 이젠 물이 암만 차올라 봤자 숨도 막히지 않고. 자네가 오가면서 외롭지도 않게 됐으니까 그런 거겠지. 사실 그동안 가장 힘들었던 건 외로움이었거든. 나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 부글거리는 비누 거품, 밤이 찾아오는 소리, 정말 아무거나 붙들고 뭔가 이야기하려고 했어. 110p

어떤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적응이 된다. 그렇게 존재는 또다시 고통에 적응한 채 새로운 무언가에 정착하여 살아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사무치는 외로움이다. 고통보다 벗어나기 어려운 외로움, 그것을 붙들고 인간은 하루를, 백 년을 살아낸다.


진실만이 답을 주는 건 아니야. 진실은 용기와 노력으로 얼마든지 바꿔 놓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건 중요한 거니까 잘 기억해 둬. 누군가에게 지금처럼 가까이, 따듯하게 다가가면 생김새 같은 건 잘 안 보이게 돼. 지금 거울이 흐려진 것처럼. 130p

재치 있는 비유를 통해 끊임없이 청소년들에게 교훈을 전하는 작가의 따듯한 마음이 느껴진다. 꿀벌, 하루살이 등 우리 주변 곤충의 삶을 가져와 인간의 삶을 빗대는 표현들도 재미있다. 작은 것들을 세심히 관찰하려는 작가의 마음을 읽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친절, 배려, 따듯함 같은 인간에게 필요한 본질적인 것들을 잃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아서일까, 따스한 마음을 발견할 때마다 그 소중함에 잠시 눈길이 머물곤 한다.

혼자가 된다는 건 정말 두려운 일이지. 이제부터 정말 외로워지겠지만, 혼자되는 거, 그거 한 번쯤은 다 겪는 일이야. 시간이 다 해결해 줄 테니까, 너무 낙심하지 마. 162p

살다 보면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홀로 되는 시기가 온다. 자의든 타의든 홀로 된다는 것은 외롭고 두려운 일이지만 세상 모든 일에 음과 양이 있듯 고립 역시 뜻밖의 유용한 점이 있다. 깊이 무르익을 시간을 얻게 된다는 점이다. 음식이든, 과실이든 , 인간이든 숙성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은 고요해야 한다. 소란과 번잡이 섞인 시간은 밀도가 낮다. 낮은 밀도의 시간은 결코 어떤 것도 무르익게 할 수 없다. 수능 재수를 하며 휴대폰부터 없애는 일, 취업을 위해 친구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일, 예술적 성취를 위해 두문불출하는 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주변을 정리하는 일은 허세나 보여주기식 액션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짜 밀도 있는 시간을 보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고독, 적응, 고통, 진실, 노력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어떤 의도에서 책을 선물해 주었는지는 선물해 준 사람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들어봐야 정확히 알게 되겠지만, 그 시간이 오지 않더라도 선물 받은 책을 곱씹어 읽으며 나만의 가치를 발견하고 의도를 추측하는 과정이 즐겁다. 내가 발견한 것들과 선물한 사람의 의도가 일치하기라도 한다면 그 기쁨은 분명 서로에게 더 큰 충만감을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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