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이라기보다는 요약에 가까움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책 "역사의 종언"이 조롱거리가 된 이야기를 꺼내며 오태민 작가는 자기주장의 포문을 연다. 소련의 해체 이후 잠시 평화로웠던 시절을 국제정치학자들은 '역사의 휴일'이라고 부르는데 아름다워 보이는 역사의 휴일은 곧 종식될 것이고 '지정학의 시대'가 돌아올 것이라고. 작가가 말하는 '지정학의 시대'란 쉽게 말해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을 뜻한다. 그런 국제질서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각국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미국이 있다.
현시대의 국제질서는 미국이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잿더미가 된 세계에서 미국은 서유럽을 원조해 재건을 촉진하는 마셜 플랜을 실행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태평양 동맹은 소련에 맞서는 보루 역할을 했다. IMF와 세계은행은 세계의 금융과 상거래를 회복시켰다. UN과 초국가적 기구들은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소하는 방법을 제시했고 질병을 박멸하고 대양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섰다. 질서를 회복하는 방법으로 세계를 통치하는 발상은 물리력으로 세계를 통치하고자 했던 이전의 제국주의와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접근이었다.
이렇게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공고히 해나가는 가운데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한 것이 중국이다. 중국은 미국이 짜놓은 판을 최대한 이용하며 이득을 챙기고 때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그 판의 규칙을 어겨가며 미국의 심기를 건드린다. 이는 세계 최대 소비국가라는 강점을 바탕으로 부릴 수 있는 호기로운 배짱전략이었다. 어느 나라건 중국 시장과 거래를 트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중국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은 그 장점을 전략적으로 이용했다. 트럼프를 필두로 한 트럼프 계열 미국 권력자들은 중국을 미국의 최대 적으로 규정하며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중국이 미국의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트럼프의 당선은 문화충격이라 할 만큼 커다란 사건이었다. 고상하고 이상주의적인 가치를 내세웠던 기존의 여타 미국 대통령들과 달리 트럼프는 대놓고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웠다. 그런데 당연해 보이는 이것이 왜 논란거리가 되었을까? 그것은 그동안 억눌려 있던 대중의 불만을 제대로 건드렸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선거기간 동안 중국, 독일, 일본, 한국에 대한 언급을 끊임없이 한다. 중국은 앞서 말했듯 미국인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쟁점으로, 독일과 일본은 미국에 도전했다가 망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동맹국으로 삼아 안보와 경제적 재건을 도와주었고 거대한 미국 시장을 개방해 번영하게끔 도와주었다는 것이 트럼프의 논리였다. 한반도는 미국 입장에서 지정학적 이익이 크게 없음에도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해 주었고 지금까지 군사적 지원을 통해 국가의 위기관리를 돕고 있다는 것이 트럼프의 주요 주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이야기는 미국인들이 손해 보고 있다는 인상을 퍼뜨리는데 일조했으며 이런 상황을 해결하고 미국이 다시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는 리더가 트럼프 본인임을 강조했다.
트럼프가 당선될 당시 미국은 외교적으로 손해 보고 있다는 인식 이전에 이미 자국 내에서도 여러 트라우마에 봉착한 상황이었다. 시장을 개방한 이후 일본, 독일, 대만, 한국, 중국에 제조업 우위를 내주었고 이는 고급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적당한 임금으로 정년퇴직까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많은 일자리가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금융, IT 등 고도화된 산업에서는 우위를 차지했더라도 중산층 이하의 실질소득이 감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전통적인 남녀관계의 경제적 기반을 허물어 가정 해체를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미국에 패전한 일본과 독일은 눈부시게 성장하고 이념적으로 적대국인 중국마저 미국의 도움으로 발전하는 상황에서 미국만 정체되는 현상을 괴이하게 느끼고 있던 참에 이런 무의식의 영역을 트럼프는 선거기간 내내 건드리며 의식의 영역으로 끄집어 올린다. 그리고 이것을 기존 미국의 엘리트 집단을 비난하는데 유효한 무기로 사용한다.
트럼프는 2024년 미국 47대 대통령에 재도전하며 J.D. 밴스를 부통령 후보로 선택한다. 이는 완벽한 전략적 의도를 포함한 인사 발탁인데 밴스는 트럼프 현상의 상징성과 완벽히 부합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힐빌리의 노래를 쓴 밴스는 소외된 미국 중산층의 전형이다. 서부와 동부에서 성공한 백인들과 완전히 처지가 달랐고 소수인종을 위한 제도적 보완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백인이라는 이유로 소외된다. 한때 제조업과 광산업의 중심지였으나 산업 쇠퇴 후 많은 가정이 무너진 러스트벨트 출신의 밴스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 가정 폭력, 약물, 범죄에 노출되었으며 알코올중독인 어머니를 피해 외할머니 아래서 자랐다. 그는 러스트벨트 출신 중 아주 드문 성공사례에 속하지만 그래서 더욱 백인 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로서 부상하게 된다.
미국과 일본의 지정학적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일본과 미국은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완충지대가 있을 뿐 두 나라의 위도 사이에는 의미 있는 국력을 가진 나라가 없어서 사실상 국경을 맞댄 나라로 보아야 한다. 더군다나 일본은 미국 본토를 침공한 유일한 나라라는 점에 있어서 미국에 큰 의미를 가진다. 1853년 미 해군 함선 4척이 도쿄만에 진입하며 일본은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일본은 그동안 추구하던 쇄국정신을 버리고 미국을 이상적인 파트너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불과 수십 년 만에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며 청나라, 조선, 러시아를 무릎 꿇리기에 이른다. 일본은 세계관을 바꾼 지 90년 만에 진주만에 폭탄을 퍼부었다. 아시아에서 서양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미국을 공격한 것이다. 미국이 일본의 세계관을 바꾸었듯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미국의 세계관을 바꾸어놓았다. 유라시아 대륙의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경계해 온 미국의 고립주의는 그렇게 부서졌다. 태평양과 대서양이 미국을 다른 대륙으로부터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미국에 일본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나라다. 가장 유용하며 가장 위협적인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에 핵을 투하하기로 결심한다. 일본은 산업화에 불리한 나라다. 평야도 자원도 없기 때문인데 그래서 일본은 필연적으로 산업화를 위해 제국주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있다. 산업화에 필요한 자원을 멀리서 끌어와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것은 광기가 아니라 살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일본은 태평양에서 미군이 진을 치고 있게 된다면 자신들이 언젠가 농업국가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자국이 직접 무력공격을 받을 때뿐만 아니라 동맹국에 대한 무력공격으로 일본의 존립이 위협받는 사태가 발생하면 반격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안보문서를 개정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미국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태평양 인근과 동아시아 지역, 특히 중국과 소련에 대한 견제를 위해 일본의 군사력을 이용했다. 일본도 이를 영리하게 이용하며 자국의 군사력을 꾸준히 증강하고 있다. 미국은 사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을 농업국가로 만들 계획이었으나 예상치 못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미국의 계획은 바뀌게 된다. 공산주의 체제와의 대리전이었던 한국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미국은 일본을 후방기지로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며 소련의 붕괴로 냉전은 끝났고 미국의 대소련 전략에서 일본의 역할은 작아졌지만 예상치 못한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 본격화되며 미국에 여전히 일본은 쓰임새 있는 존재로 남게 된다. 한반도가 통일이나 전쟁으로 나서지 못하고 현상유지가 길어지는 것이 일본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있다. 만약 통일이 된다면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할 필요성이 없어지게 되는데 미국을 위협하는 강력한 두 나라인 중국과 일본이 손잡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때 한반도에 미군을 주둔시키는 것이 미국 입장으로서는 위험요인을 예방하는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트럼프가 미국 내에서 호응을 얻는 것은 세계문제에 관여하는 일에 미국 국민이 얼마나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지를 대변한다. 하지만 고립주의가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데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미국은 실제로 해외와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있으며 특히 석유자원의 해외 의존도가 문제였다. 중동지역에 끊임없이 관여해야 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중동에 대한 석유의존 때문이었다. 고립주의자들조차 미국이 석유자원을 포기하고 발전으로부터 눈을 돌리자고 할 수는 없었다.
미국은 왜 이렇게 중동에 맥을 못 추는 것일까. 중동은 미국 외교정책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역사적 박물관과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이 중동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시기는 1950년대다. 당시 중동은 영국, 프랑스, 소련 세 열강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었고 미국의 존재감은 지금과 달리 미미했다. 하지만 1952년 이집트 혁명을 시작으로 중동의 질서는 급변하기 시작한다. 이집트의 나세르가 이끄는 청년 장교들은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권력을 장악한다. 나세르는 아랍 민족주의라는 이념을 내세웠다. 그것은 단순한 국가주의가 아니라 아랍 세계의 통합, 서구 열강의 축출, 독립적인 경제 개발을 의미한다. 나세르는 이념적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서방 열강의 영향력을 몰아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1956년 나세르는 아스완 하이댐 건설을 위해 미국과 서방국가의 지원을 얻으려 하지만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하라는 서방의 요구에 중립외교를 실천하는데 이는 미국의 불신을 불러오게 된다. 결국 미국과 세계은행은 아스완 하이댐 건설 자금을 지원하지 않고 이에 격분한 나세르는 1956년 7월 극단적인 결단을 내리는데,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기로 한 것이다.
수에즈 운하는 영국이 관리하던 국제적 무역로였다. 이곳은 서유럽이 아시아와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핵심 해상로로 영국과 프랑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연합하여 군사 작전을 계획한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선봉에 세워 이집트를 침공한 후 영국과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를 재탈환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1956년 10월 이스라엘은 시이나반도를 침공하며 수에즈 위기가 본격화된다. 그러나 이 작전은 미국의 반대에 부딪힌다. 미국은 소련의 확장을 막기 위해 서방 연합군은 정당성과 도덕성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영국과 프랑스의 군사 개입은 제국주의적 야욕에 불과하고 이는 냉전 상황에서 서방 진영의 도덕적 입지를 약화시킬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가 철수하지 않으면 경제적 제재를 가하겠다고 경고한다. 영국은 당시 경제적으로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경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이 사건은 서방 동맹 내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위상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그 결과 나세르의 정치적 입지는 강화되었고 수에즈 위기를 통해 나세르는 중동 전역에서 아랍 민족주의의 상징적 지도자로 떠오르게 된다. 그의 카리스마와 메시지는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며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등 다른 아랍 국가에서도 반 서방 정서와 민족주의 열기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1958년 나세르는 시리아와 통합을 통해 아랍 연합공화국을 출범시키며 아랍 세계의 통합을 차근차근 현실화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통합 시도는 내분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고 중동 지역은 더욱 심각한 갈등과 혼란이 초래되었다. 이 혼란은 단순히 지역적 불안정성을 넘어 냉전의 전장으로 확장된다. 나세르의 공화주의와 민족주의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보수 왕정국가들과의 대립을 촉발시켰고 이 갈등은 예맨 내전과 같은 대리전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이런 상황을 공산주의의 확산으로 간주하며 중동에서의 군사적 경제적 개입을 강화해 나간다. 1957년 미국은 독트린을 발표하며 중동에 대한 본격적 개입을 선언한다. 독트린은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면 군사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원칙을 포함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중동에서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위상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권국으로 인식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종교적, 민족적, 정치적 갈등에 휘말리게 되고, 이는 훗날 이란혁명, 걸프전쟁, 이라크 전쟁 등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개입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의 중동 불안정성에까지 그 영향을 끼친다. 미국은 외교를 할 때 늘 도덕적 우위를 지키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도덕기준이 미국과 다르거나 도덕기준 자체를 무시하는 현실 세력들을 제어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2001년 9월 11일 9.11 테러가 발생한다. 이 사건의 주동자 오사마 빈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었으나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책임을 묻기 어려웠다. 이유는 그 둘 간의 지정학적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사우디 극단주의자들이 미국 본토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신성한 사우디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하게 된 계기는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때문인데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발생한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군사력이 약한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쿠웨이트는 석유 매장량이 풍부하고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후세인은 이곳을 장악하여 경제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그러나 이 침공은 국제사회의 반발을 불러왔는데 특히 미국으로서는 국제 석유가격을 흔들 수 있는 생산점유율을 독재자의 손에 쥐어줄 수 없었다. 그래서 걸프전쟁을 통해 이라크군을 쿠웨이트에서 축출했다.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미군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대규모 군사기지를 구축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후세인을 미국이 지원해 왔다는 사실이다. 1979년이란 혁명으로 친미왕정이 무너지고 호메이니 신정체제가 들어서면서 미국은 이란에서 확산되는 이슬람 혁명을 저지할 방파제가 필요했고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이라크가 그 대안이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미국은 공식적으로 이라크를 지원했지만 뒤에서는 이란에도 무기를 공급하며 양국의 소모전을 유도했다. 미국의 목표는 두 나라가 서로를 소진시켜 중동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는데 전쟁이 끝난 후 사담 후세인은 이란과의 전쟁으로 발생한 엄청난 손실을 메우기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이 유지하고자 했던 중동의 현상유지를 노골적으로 깨뜨리는 행위였고 결국 미국은 걸프전을 통해 이를 바로잡으려 했다. 하지만 걸프전은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미군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둔은 많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충격과 분노를 일으켰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메카와 메디나, 이슬람교의 두 성지가 있는 신성한 땅인데 이 땅에 이교도의 군대가 주둔한다는 사실은 많은 무슬림에게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오사마 빈라덴과 알카에다 같은 극단주의자들에게 이는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었고 미군의 사우디 주둔 철수를 요구했다. 하지만 미군은 철수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빈라덴은 미국을 사탄의 세력이라 규정하며 테러를 감행한 것이다. 9.11 테러는 미국이 이상주의적 외교 정책을 중동에 적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테라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2003년 이라크 침공을 감행한다. 미국은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심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이라크 침공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왔다. 미국의 공격으로 사담 후세인의 수니파 정권이 붕괴되면서 이라크 내 시아파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된다. 그로 인해 같은 시아파였던 이란의 영향력이 이라크 내부에서 급속히 확장된다. 권력을 잃은 수니파들은 알카에다 같은 극단주의 단체로 흡수되었고 더 나아가 이슬람국가 isis라는 초국가적 무장조직이 탄생하게 되었다. ISIS는 2014년 이라크와 시리아 국경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국가'를 선포하며 중동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미국은 결국 이라크, 터키, 러시아, 이란과 협력하여 ISIS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중동은 더욱 파괴되고 분열된다. 이렇듯 미국이 중동에서 하나의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발생한다.
2020년 9월 15일 미국 백악관에서는 역사적인 협정이 체결된다. 아브라함 협정이 바로 그것인데 이 협정은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간의 외교 정상화를 공식화한 합의였다. 이 협정은 트럼프의 중재로 성사되었으며 이는 중동의 외교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협정의 핵심 골자는 아랍에미리트와 바레인이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국가로 승인하고 정상 외교 관계를 수립하며 대사관 설치, 경제 협력, 항공편 운항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많은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1948년 1차 중동전쟁, 1967년 3차 중동전쟁, 1973년 4차 중동전쟁을 포함한 수차례의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 갈등의 핵심에는 팔레스타인 문제가 있었으며,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등의 점령지에서 철수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갈등의 불씨였다. 그러나 2000년 들어 중동의 역학 관계는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이란의 군사적 부상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란은 시아파 세력을 중심으로 수니파 왕국들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란의 세력 확장은 이스라엘과 걸프 국가들 모두에게 공통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은 협력이 필요해졌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중동의 반이스라엘 정서를 결집시키는 핵심 쟁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진전시킬 때마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은 무력 투쟁을 격화시키곤 한다. 이스라엘은 이에 강경한 군사 대응을 하게 되고 그 결과 반이스라엘 여론은 또 확산된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은 수십 년간 중동 평화 협상의 핵심 의제였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를 꼽자면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군사적 독립성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현재 지정학적 구조에서 팔레스타인에 독립적인 군대를 허용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의 주요 후원자는 시아파 이란인데 이란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며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동시에 반이스라엘 정서를 자극함으로써 이란 혁명의 도덕적 정당성을 중동 전역에 확산시키고 있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대표 격으로는 하마스와 헤즈볼라 등이 있다.
중동과 동북아시아는 각각 이란과 중국이라는 강력한 수정주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오랜 갈등을 뒤로하고 새로운 협력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을 겪고 있다. 이 두 지역은 모두 미국의 '지역 문제의 지역화' 전략이 본격화되면서 중요한 실험장이 되고 있다. 트럼프 2기부터 이 전략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직면한 여러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트럼프 정권은 비트코인을 선택했다. 단순히 유권자의 표심을 인식한 선거구호에 그치지 않고 취임 직후 친암호화폐 인사를 등용한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비트코인은 10만 달러를 돌파하며 전 세계 자산 시가총액 6위에 등극했다. 비트코인이 갖는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변제의 최종성이다. 비트코인 네트워크에서 일단 한번 거래가 승인되면 되돌리거나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는 기존 금융기관이 갖는 장점인 책임변제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소비자 보호가 어렵다는 의미다. 책임변제는 금융기관이 금융거래를 할 때마다 가져가는 수수료에 대해 이용자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기업은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여유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 장점이 될 수 있을까. 나쁜 마음을 먹고 신용카드 분실 신고 후 카드를 사용하거나 송금 오류로 발생하는 피해보상 등 은행에서 대비해야 할 리스크가 비트코인 생태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기술적으로 보완만 된다면 수수료가 0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큰 금액을 이용하는 사람일수록 수수료를 아끼는 일은 피부에 와닿는다. 단, 이러한 특징 때문에 범죄에 비트코인이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제도권의 금융을 이용하지 못하는 불법 조직들이 자금 추적을 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트코인을 이용하기 좋기 때문이다. 이는 단점이자 장점인데, 어둠의 세력들이 자금 이동을 위해 비트코인으로 대량의 자금을 유입시킬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은 화폐로서 몸뚱이를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지만, 세계 평화의 측면에서 본다면 명백한 단점이다.
둘째. 개별 국가의 통화 주권을 훼손한다는 점이다. 국가는 자국 화폐를 통해 경제를 조율하고 안정시킬 수 있다. 이를 위해 국가는 자국민들이 자국의 화폐를 사용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통화정책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거나 억제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들이 자국 화폐 대신 비트코인을 사용하게 되면 통화 정책이 제대로 먹혀들기 힘들어진다. 자국민들이 자국 화폐보다 비트코인 같은 대체 자산을 사용하게 되면 자국 화폐의 신뢰도와 유용성이 떨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는 예상치 못한 물가 변동에 취약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개별 국가의 통화주권을 훼손시킨다는 이유로 미국의 달러 CBDC 발행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는 미국이 전 세계 경제를 장악하게 놔두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은 현재 달러가 기축통화인 시장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아주 복잡하게 얽힌 나무줄기를 끊는 일이라 섣불리 시행하기가 어렵다. 세계경제를 떠받치고 있던 어느 기둥이 무너질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변수는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다. 미국적 질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중국이 떠올린 일대일로 프로젝트가 그렇다. 일대일로는 처음에는 완벽한 아이디어처럼 보였다. 지정학적 문제와 과잉생산된 물자와 잉여자본 투자를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었다. 중국은 미국적 질서에 저항하고 소련의 패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크로드를 복원한다는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천명한다. 이것은 단순하게 말해 중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서쪽 루트를 개발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도를 개발하고 땅을 개발하고 바닷길을 개발하고 기름길을 개발한다. 이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실크로드의 영광을 추억하는 중국인들에게 매력적이고 낭만적인 브랜딩이었으며 처음에는 꽤나 성공적으로 보였다. 아프리카 및 남아메리카의 주요 국가들은 중국의 넘쳐나는 자본을 융자받아 철도와 항만, 도로와 발전소를 건설한다. 그에 필요한 물적 자원과 인적자원 역시 중국에서 조달한다. 이로서 중국은 잉여자원을 빌려주어 금융 이득을 얻고, 채굴한 자원을 다시 되팔아 이득을 얻으며 자국민들의 일자리 창출까지 해결한다. 더군다나 중국으로부터 투자받은 나라들은 경제가 발전하니 중국과 정치적으로 긴밀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버려 중국은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위치로 점차 올라서게 된다. 그야말로 자본과 기술과 사회간접시설을 건설하는 중국 패권의 무한확장 동력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다만 여기에는 중국이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술력과 복잡한 정치관계였다.
중국이 투자를 감행해 지정학적 동료로 끌어들인 국가들은 대부분 개발도상국이었다. 개발도상국들은 안정된 사회가 아닌 경우가 많다. 돈이 들어오니 당장의 경기는 살아나지만 정권유지와 엘리트집단의 배를 불리기 위해 상당한 금액이 뒷돈으로 흘러들어 가게 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부실공사를 낳는다. 그러다가 정권이라도 바뀌게 되면 이전 정권 인사들을 부패로 엮어 감옥에 보내야 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들어온 거대 자본과 프로젝트의 오점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또한 중국의 융자는 이자율이 높아 생산적으로 쓰이지 못한 상황에서 그 빚을 갚지 못하게 될 확률이 크다. 따라서 중국은 마치 사채업자처럼 빚을 갚지 못하는 나라들의 항만과 철도를 수십 년에서 100년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중국이 진출한 국가에서는 반중정서가 점차 높아지게 된다. 일대일로는 실패하고 있다.
미국 정치의 역동성은 민주주의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트럼프 현상 또한 민주적 현상이다. 세계의 많은 언론은 트럼프를 독재자로 묘사하곤 한다. 트럼프 현상은 미국 민주주의와 세계인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하나의 사고실험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미국이 처해있는 지정학적 상황과 미국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세계경찰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비트코인은 미국에 전략자산이 될 수 있다. 먼저 중국 제어에 도움이 된다. 중국의 자본은 이동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추적이 불가능한 특징을 가진 비트코인은 중국 부호들이 자산을 은닉하기 좋은 도피처다. 그리고 그것이 가속화될수록 중국 지도부의 국가 통제력은 약해질 것이며 그것이 곧 미국이 바라는 바다. 비트코인이 다른 수많은 알트코인과 구별되는 이유는 단순히 최초의 블록체인 코인이라는 점, 시가총액 1위라는 점, 개당 가격이 높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하고 강력한 이유는 비트코인의 게임 상대가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강력한 국가의 정부들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비트코인이 모든 코인 중 가장 탈 중앙화 되어있으며 법정에 불러 세울 타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비트코인은 어느 국가에서나 교환과 사용이 가능한 초국가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비트코인이 금지될 것이라 상상하는 것은 이런 이유로 이상주의에 가깝다.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국제질서와 신제국주의적 양태를 띤 현재 세계 지정학 시스템 체제하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비트코인을 금지시킨다는 것은 현대 국가들의 지정학적 관계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극단적으로 말해 현시대는 무질서의 세계, 미국이 패권을 잃어가는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리더의 부재는 혼란을 가져오고 혼란의 시기에는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는 모험을 감행해야 할 필요도 있다. 국경을 넘어 샤로운 터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비트코인의 존재가 소멸하기는 어렵다. 지정학적 위기를 토대로 비트코인의 확장성, 유용성, 필요성을 주장하는 저자의 이야기가 다소 극단적인 것 같지만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지점들이 많다. 책을 다 읽고 나니 10년 뒤, 20년 뒤 화폐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하기도, 무섭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