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해석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
2024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사람의 16.2%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많은 숫자가 속해있는 단체이니만큼 아무래도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한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타 종교에 비해 유독 배타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윤리적인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 책은 그간 품고 있던 궁금증과 호기심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주었다. 종교는 단순히 신에 대한 믿음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사회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작동하는 체계다.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다소 불편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지만 대한민국을 해석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여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두고자 한다.
1. 여성 혐오의 최전선인 교회(교회는 차별과 이분법적 사고가 일상인 곳)
미국의 기독교는 "근본주의"를 채택한다. 근본주의란 현실과 다른 이상향(근본)이 존재한다는 논리다. 이것은 기독교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고대 철학자들의 이데아 사상에서 영향을 받아 발전 계승되어 왔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론적 가치체계다. 따라서 근본주의적 관점을 지닌 사상은 현실이 고된 사람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다. 이것이 교회가 기본적으로 이분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의 근원이며 현실은 악이고 이상은 선으로 바라보는 가치체계의 기초가 된다. 하지만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며 약간 변질되었다고들 말하는데 그 이유는 한국의 기독교는 근본주의이긴 하나 그 "근본"을 세속적 성공과 매칭시키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다. 이는 극적인 사회발전과 소비주의가 기독교라는 종교와 맞물려 한국의 교회는 자본주의의 부속이 되어버렸다.
(1) 성경의 내용을 근거 삼아 여성은 열등하고 위험한 존재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품고 있다. 성경에는 여성 혐오의 이미지가 넘쳐난다. 하와(악녀)와 마리아(성녀)로 대표되는 여성상을 비롯하여 성경에서는 여성 캐릭터들이 다층적이지 않고 주로 선과 악 이분법적으로 묘사된다. 게다가 여성들은 주로 출산과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역할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여성을 혐오하도록 만드는 근간으로 작용한다. 혐오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시작된다. 정상이 아닌 것은 비정상이고 그것은 혐오의 대상이 된다. 6.25 이후에 악당은 공산당이었고 그 악당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 가며 대형교회와 국내 지도층들이 대중의 시선을 돌리는데 적절하게 활용하기 좋은 공공의 적이 되었다. 대한민국이 신자유주의 체제로 들어서면서 명확한 악당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대중의 삶은 점차 고통스러워지고 있는데 인간에게는 언제나 화풀이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수한 혐오주의가 난무하며 교회와 정치는 때때로 이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2) 교회에는 여성 지도자가 거의 없다. 제도적으로 불가하도록 막아두지는 않았으나 교회 전체에 보이지 않는 손이 너무 많이 개입되어 여성이 지도부로 올라가기가 무척 어렵다. 남녀평등을 측정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로 그 분야의 최상층에 성비를 활용할 수 있다.
(3) 특별한 날 교회 안의 여성들을 한복을 입거나 행사에서 보조자의 역할만을 수행한다. 교회의 꽃, 교회의 마스코트 등으로 불리며 여성을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이는 실상 주요한 의사결정이나 행사를 지휘하는 자리에 여성이 위치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차별과 이분법적 사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동성애 반대를 예로 들 수 있다. 동성애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틀렸다. 이성애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성애와 관련된 질문을 자꾸 던지는 이유는 동성애라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모든"인간을 사랑하고 평등하게 대하라고 말했는데 이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기는 행위이다. 왜 환대와 책임의식, 사랑과 연대를 특정 집단에게만 발휘하는 것인가. 이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모순되는 행위이다.
2. 교회가 세를 늘릴 수 있는 이유
한국전쟁 당시 외국의 원조를 국민들에게 나누어줄 만한 시스템이 국가에 없었다. 그 역할을 교회가 했다. 이때부터 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자원을 과점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수많은 기관들의 운영과 교육, 복지, 의료, 경제, 언론 등 한국사회의 커뮤니티의 큰 축으로 성장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1) 교회는 본디 피곤한 노동자들의 쉼터 역할을 했다. 6.25 이후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바탕에는 노동자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서려있다. 고강도, 장시간 노동은 피로를 누적시키고 이는 현대사회에까지 그대로 이어져왔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눈부신 발전을 이뤄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점차 피폐해져 갔다. 비정규직의 비율이 높아지고 노동은 더 이상 희망적이지 않은 불안한 노동이 되어버렸다. 월급으로는 집을 살 수 없고, 대졸자도 취직이 힘들며, 퇴직 이후의 삶까지 걱정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정신을 보듬어줄 하나의 사회적 복지시설의 역할을 교회가 하고 있다.
(2) 미션스쿨, 즉 종교에서 설립한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이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기독교 사상을 학습하게 된다. 그렇다면 미션스쿨은 왜 다니는 것인가. 높은 퀄리티를 기대하거나 부모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발을 들이는 경우가 많겠으나 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미션스쿨은 미국과의 연결을 보다 용이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유학파들의 출세가 어느 정도 보장되는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여전히 유효한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자연스레 이는 한국 기독교가 친미적인 성향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을 의미하며 개신교를 하나의 신분상승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사람들과 신도를 유입하고자 하는 개신교의 니즈가 서로 맞물려 작동하게 된다.
(3) 국가가 미처 책임지지 못한 복지의 사각지대를 살피며 복지국가의 역할을 일부 담당한다. 교회는 일자리를 알선하거나 의료적 지원, 혼자 사는 노인들에 대한 정서적 지원 등을 제공한다. 이는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당기는 강한 촉매적 역할을 하며 이렇게 늘어나는 신도의 숫자와 그에 따라오는 각종 이윤으로 인해 사회적 자본을 점차 확장해 나가며 이는 또다시 새로운 신도의 유입을 불러오는 순환적 구조를 만들어낸다.
(4) 1980~1990년대 경제 급성장에 따라 강남이 급격하게 커졌고 그에 따라 강남에서는 대형교회가 속출했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강남 부자들에게 사회적, 문화적 지위가 필요해졌고 강남의 대형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인맥형성과 고급 사회간접자본을 향유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져 신분상승의 한 도구처럼 여겨졌다.
이를 종합적으로 봤을 때 한국형 교회는 성공과 복지라는 두 가지 개념을 바탕으로 맹위를 떨친다. 앞에서 설명한 한국식 자본주의, 즉 근본을 성공으로 바라보는 한국적 근본주의를 탑재한 방식으로 작동되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 일요예배 기준 2천 명 이상의 신도가 모이는 교회를 대형교회, 1만 명 이상의 신도가 모이는 교회를 초대형 교회라고 칭함.
3. 교회의 모순
(1) 개신교는 분배에 적대적이다. 세금도 내기 싫어하는 조직에서 분배를 논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개신교에서 제공하는 복지는 그 자체로는 분명 순기능이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세력 확장을 통해 특권층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
(2) 평등과 차별 없는 세상을 말하지만 대형교회 안에는 엄청난 계급화가 존재한다. 연령별 모임, 구역모임, 직업별 모임 등 각종 모임이 이루어지고 이러한 모임들은 대게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형성된다. 왜냐하면 비용을 분담하기도 용이하고 서로 향유하는 문화가 비슷하기에 이질적인 사람 때문에 골치 아플 일도 없으니 강력한 끼리끼리 문화가 자연스레 형성될 수밖에 없다. 이는 명백히 기독교 교리에 위배되는 모순적 행위이다. 게다가 목사는 성도들을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바라보고 있다. 이는 반말, 협박, 명령 등을 일삼는 목사의 태도를 통해 알 수 있다.
(3) 지나친 권력에 대한 집착(한국사회의 축소판)
교회에는 여자 목사가 없다. 이는 가부장제의 적극적 옹호로 보이며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기독교의 교리에 어긋난다. 교회의 대표 목사를 담임목사라고 칭하는데 이 담임목사 자리를 보통 아들이나 사위에게 물려준다. 승계의 과정은 대부분 비공개이며 정보공개를 요청할 수도 없고 요청한다고 해서 공개해야 할 법적 제도적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어느 조직이나 회계의 투명성을 담보하는 것이 건강한 조직의 기본 규칙인데 교회에는 재무팀이 없으며 목사가 재정을 좌우할 권한을 가진다. 비판을 제기하는 신도에게는 조직의 최대 지식이자 공동의 선인 하느님의 뜻이라는 논리로 묵살한다. 여기서 신도들은 더 이상 비판을 제기할 수 없게 된다.
(4) 이상한 직급체계
미국 교회의 경우 장로나 권사 등의 직급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목사를 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초빙하지 않고 "본부"라는 개념에서 "파견"을 한다. 파견된 목사는 5년 이상 근무하지 못하고 순회해야 하며 교회의 위원회에서 파견 나올 목사를 인터뷰함으로써 검증의 과정을 거친다. 이 위원회 역시 남, 녀, 청년 등의 일정한 비율이 존재하며 3년 이상 위원회에 소속될 수 없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이와 대조적으로 "기한"이 제도화되어 있지 않아 사실상 "무기한" 근무가 가능하다. 목사의 초빙 과정 역시 공개하지 않는다. 또한 미국의 교회에서는 담임목사가 신도들의 헌금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데 반해 한국교회에는 "주보"에 누가 얼마를 냈다는 등의 기록을 남겨두는 차이점이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한국의 대학교수 임용에 있어서도 비슷하게 발견된다. 한국사회는 구석구석 이런 식으로 작동된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구현되었으나 사회적 민주주의는 아직 멀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5) 세금 문제
2018년 1월 1일부터 종교인 과세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는 반쪽짜리 제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과세자 본인이 근로소득세로 신고하지 않는 한 교회는 기타 소득을 기준으로 과세한다. 기타 소득은 필요경비(80%까지 경비처리 가능)를 공제하고 과세액을 매길 수 있다. 예를 들어 1억이 소득이라고 하면 80%인 8천만 원을 필요경비 처리하고 2천만 원에 대해서만 과세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종합 활동비"라는 명목이 있는데 이는 애초에 종교인의 소득으로 포함하지 않아 과세를 할 수 없다. 종합 활동비의 세부 항목은 도서비, 자동차 유지비, 자녀 장학금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얼마든지 탈세의 수단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 거기에 더해 부가적인 촌지 수입이 존재한다. 촌지 수입이란 심방비(집에 가서 기도 해주고 받는 수고비), 결혼 주례비, 장례 집전비 등의 형태로 전달되는데 이는 대부분 현금으로 목사에게 직접 전달이 되기에 과세가 불가능하다.
(6) 리베이트와 탈세의 수단
교회는 부동산 거래 시 소득세와 취득세를 면제받는다. 이것만 봐도 엄청난 특혜임이 분명하다. 여기에 더해 건축과정에서 비용도 엄청나게 뻥튀기가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기업을 운영하는 교인이 회사의 자금을 교회에 기부하여 그 기부금으로 건축을 진행한다. 교회의 건물은 취득세 소득세가 면제되며 건축의 과정을 들여다볼 제도적 장치가 없기에 각종 리베이트와 뻥튀기가 가능해진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백억을 기업인에게 기부받은 교회는 문서상 이백억의 가치를 지닌 건물을 올린다. 교회는 공짜로 건물을 올려 신도를 끌어올 수 있어 이득이고 기업인은 기부한 돈의 일부를 돌려받는 형식으로 탈세나 비자금을 형성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근본적 원인은 국가의 세무 공무원들조차 교회의 재정을 열람할 권한이 없을 정도로 교회가 막대한 특혜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4. 기독교가 비판받는 이유
(1) 지나치게 권력을 추구한다.
종교의 본래 목적과 달리 정치와 지나치게 연계되어 권력을 추구하고 있다. 국가조찬기도회를 열어 국가 지도자들과 접점을 유지하려고 하거나 한기총을 비롯하여 각종 단체를 설립해 이익을 추구하려는 모습이 국민들의 반감을 산다.
(2) 건물 중심 성장주의
성경 어디에도 교회를 크게 지으라는 말은 없다. 성령은 본디 인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은 믿음과 행동으로 스스로가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성경의 말씀과는 달리 한국 교회는 건물을 키우는데 혈안이 되어있고 이것은 교회를 비즈니스 모델로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점이며 이것이 기를 쓰고 목사직을 직계 가족들에게 승계하려 하는 이유가 된다.
(3) 비겁한 낙관주의
종교란 본디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바라보게 만드는 낙관론을 펼쳐야 함이 마땅한데, 한국 기독교는 권력의 품 안에서 아첨을 통해 낙관주의를 펼치고 있다. 이는 대중을 위한 종교가 아닌 권력을 위한 종교임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4) 군부 정치 세력과 산기도원의 공생, 그리고 태극기 부대
군부독재 시절 새마을 운동으로 시작된 경제개발 운동은 국민들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이는 잘 먹고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자부심이었으며 그것을 가시적이며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은 우리 눈앞에 거지가 눈에 띄게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국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해 있는 기도원들이었다. 이런 기도원들은 교회의 하부 조직으로 운영되어 교회와 국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운영되었으며 기도원에는 사회적으로 도태되어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수용되었다. 국가의 체면치레와 기도원의 수익창출 욕구가 맞아떨어져 처음에는 부랑자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만을 수용하던 산기도원은 이후 장애를 가진 사람, 몸이 아픈 사람 등 보살펴 줄 가족이 없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 대한민국의 교육 수준이 전반적으로 오르고 군부세력이 자취를 감추며 산기도원의 자금줄과 사회적 필요성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산기도원에서 기거하던 사람들이 점차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주로 외치는 구호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었으며 이들의 대부분이 태극기 부대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산기도원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군부세력과 기독교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사상과 군부세력에 대한 찬미를 오랜 세월 학습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태극기 부대가 무조건적으로 군부세력을 옹호하는 이유이다.
(5) 그 외
배타성이 너무 강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 배타성은 반공과 타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주로 드러나다가 요즘은 반동성애로 주요 담론을 옮겨가는 양상을 보인다. 단군상을 절단한다거나 절에 불을 지르거나 땅밟기 운동이라 불리는 행위(타 종교에 가서 찬송가 부르기)등을 통해 기독교가 타 종교에 품는 배타성의 강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또한 북한의 3대 세습에 반대하며 김 씨 일가를 비판하면서도 교회 내부에서는 목사직을 세습하는 모순을 보이며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져있는 모습이 우스워보이기도 한다.
5. 그럼에도 교회의 권력이 유지되는 이유
여러 가지 눈에 보이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유지되는 이유는, 인간은 본디 자신의 욕구가 좌절되지 않는다면 굳이 나서지 않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굳이 나서지 않는 이유는 교회라는 거대한 공간 안에서 개인들이 누리는 이득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교회가 세를 늘릴 수 있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그 외에도 대형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소속감, 명품을 소비한다는 착각, 검증된 결혼시장에 참여, 사회적 네트워크 형성 등의 이유를 추가로 꼽을 수 있다.
6. 마무리
성경을 성경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개별 목사들의 잘못된 해석만을 통해 교리를 듣는 것이 문제다. 이는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수직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며, 애초에 비판과 다양한 해석이 불가능하도록 막아서는 교회의 폐쇄성 때문에 비롯되는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