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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Sep 02. 2020

열 번의 이사, 첫 번째 나의 집.

길고 긴 여정

머릿속에 기억이라는 것이 자리 잡을 만한 나이가 된 이후로 이사를 다녔던 집이 열 곳 정도 떠오른다. 


기억이라는 것은 발화 조건을 갖추었을 때 타오르는 연기와도 같아서 기억을 건드려 줄 특정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갑작스럽게 폭발적으로 피어오르다가도, 그것이 다 타버린 후에는 공기 중으로 흩어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처럼 흩어진 후에는 머릿속에서 아무리 그 자취를 찾으려 애써 보아도 도무지 찾을 수 없는 무의식의 뒤편 어디론가 꽁꽁 숨어버린다. 특히 나이를 먹을수록 오래된 기억들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잊힌다는 것을 깨닫고, 생각난 김에 그간 옮겨다닌 집들에 대해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정리를 한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사를 꽤 여러 번 다녔다는 생각을 간혹 했었다. 6.25를 겪은 피난민들처럼 감자를 먹고 총알을 피해 가며 남으로 남으로 내려간 것은 아니었지만,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때로는 어려운 상황을 미처 피해내지 못한 대가로 가혹한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우리 집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오랜 시간을 세월과 싸우며 지냈다.  


우연히 예전에 살던 집 근처를 지날 때면 상념에 잠기게 된다.


우연히라고 말하기엔 결코 우연히 발생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이것은 우스운 말이기도 하다. 이사를 다녔던 10곳의 범위를 그려본다면 아마 반경 5km가 넘지 않을 것 같다. 이 좁은 범위는 적어도 일주일, 아니 며칠에 한 번씩은 내가 살았던 집 근처를 지나게 만드는 상황을 유발한다. 그렇기에 상념에 젖는 일이란 결코 우연히 발생할 수 없다. 어쩌면 일상의 한 부분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자주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작은 중소도시에서 평생을 살아왔기에 가정과 직장을 포함한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가끔의 이벤트를 제외하면 반경 20km도 되지 않는 작은 세계에서 모두 이루어진다는 일이 때로는 감사할 때도 있지만, 이전의 어려웠던 시절을 자꾸만 떠오르게 만들어 자기 연민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 때문에 더러는 귀찮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세월은 흐르고 세상이 변한 만큼 나의 삶 역시도 많은 부분 바뀌어왔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에 나는 항상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과거보다는 현재를 사랑했고, 미래를 기대했다. 그런 삶을 살아오다 보니 나에게 있어 과거란 그저 지나간 순간, 잊힌 순간이 되기 일쑤였다.


사람에겐 뿌리라는 것이 있다.


뿌리란 조상이나 가문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보다 개인의 역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끼쳐왔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현재의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 때로는 외면하고 싶기도 하고 때로는 은덕을 입기도 하는, 악마이자 천사의 얼굴을 한 나의 뿌리. 그 뿌리의 여러 갈래 가운데 내가 살아온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유년시절, 5~7세로 기억되는 나의 인생의 최초의 기억들 가운데에 나의 첫 번째 집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공단으로 개발되어 이전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 부근을 지날 때면 여전히 어린 날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사를 와서 옆집에 처음 인사를 갔던 순간, 유치원이 끝난 후 공터에 모여 매일같이 해가 지기 직전까지 뛰어놀던 기억, 친구의 자전거를 빌려 넘어지고 깨져가며 자전거 연습을 하던 순간, 무더위에 잠 못 들던 자식들을 자동차 에어컨 바람을 쐬어 재워가던 부모님의 모습, 동네 구석진 곳에 혼자 살던 꼽추를 무서워했던 기억, 동네 뒤편에 있던 운전면허 연습장에서 흙먼지를 먹어가며 비탈길을 놀이터 삼아 놀았던 순간들, 동네 초입에 있던 고물상에 숨어 들어가 숨바꼭질을 하다가 무서운 고물상 주인아저씨를 피해 다녔던 일, 연탄을 땠고 화장실이 집 밖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열악한 주거환경이 틀림없는 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이어서 그런지 첫 번째 집에서의 기억과 감정은 나쁜 것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주된 감정으로 더욱 어울리는 것도 같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인생 첫 번째 이사는 초등학교 입학 즈음이었다.


학교와 집은 신호등 하나를 건너면 되는 거리였다. 어른의 걸음으로 5분이면 도착할 거리가 그때에는 왜 그리도 멀게 느껴졌는지 모를 일이다. 초품아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동네의 초등학교와 가까운 위치의 집을 고민했지 않았을까 나름의 추측을 해본다.


대로변의 고지대에 위치한 주택으로 대문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꽤 가파른 각도의 계단을 올라야 했던 기억이 난다. 높고 가파른 계단으로 인해 정강이에는 상처가 아물 새도 없이 새로운 상처가 덧씌워졌다. 집 마당은 나무가 무성했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당에서 강아지를 키웠었다. 집 옆엔 동네에서 가장 큰 교회가 있었고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을 따라 교회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간식을 먹으러 들락거렸던 기억이 난다. 학교 앞에서 만화책을 늘어놓고 팔던 할아버지에게 드래곤볼 34편을 샀던 것이 인생 최초의 만화책 구매였고 그로 인해 만화책방을 드나드는 생애 최초의 취미가 생겼다. 2번의 도둑이 들었고, 친구가 우리 집 근처에서 교통사고 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 도시개발지구 가운데 한 곳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부모님이 다른 개발지구를 선택했더라면 아마도 많은 것들이 바뀌었을 테지만, 그때는 아마도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테다. 인생은 항상 지나고 나서야 정답을 알려주곤 하니 말이다. 11살부터 19살.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이 집에서 보냈다. 하여 대부분의 학창 시절의 친구들이 이곳에서 형성되었고 동네 구석구석 골목길을 모두 알고 있을 정도로 동네에 빠삭하게 되었다. 2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간혹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동네 친구들 모임을 하러 그곳에 가면 오랜만에 본가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나에게는 고향과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장소가 되었다.


그렇게 스무 살이 되었고 IMF를 겪은 그 시절의 많은 집들이 그러했듯 우리 집 역시도 경제적인 충격을 집안 곳곳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앞선 두 번의 이사는 아직 자아가 확립되지 않은 시기였고, 어찌 보면 경제적으로 조금씩은 좋아지고 있던 때라고 생각해도 좋았을 상황이었기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흘려보냈지만 지금부터 겪게 될 7번의 이사는 이제 성인이 되어버린 나에게 매번 얼마간의 충격과 고통, 그리고 한숨을 새겨 넣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0년을 살았던 아파트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등 떠밀리듯 이사를 했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급하게 집을 알아봤기 때문일까. 향후 옮겨 다니게 되는 집들은 대부분 옥탑방이거나 낡은 주택들이었다.


차가 한 대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좁고도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정류장에서 내려 10여분 정도 걸어 들어가야 발견할 수 있는 집이었다. 발견할 수 있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가로등이 없는 어둑한 골목길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내내 꿔왔던 꿈이 좌절되며 원치 않는 대학에 입학해서였을까, 그게 아니면 기울어가는 가세를 바라보며 원망스러운 마음이 커졌때문일까? 모든 것이 싫기만 했다. 얼어 죽은 쥐를 집안에서 발견할 정도로 춥고 열악했던 집의 상태도 싫었고, 기름값을 아끼려고 보일러를 틀지 않으면서도 꼬박꼬박 용돈을 챙겨주는 어머니도 싫었으며 급하게 이사를 하면서도 아들 대학 다니기 편하라고 학교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한 것도 싫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탓에 자기 주량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면서 근 3개월 간을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어 거의 매일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스무 살이 넘었으면 자기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지금 나의 신념과는 다르게 그때 나의 스무 살은 참으로 볼품없이 철없었던 시절이었다.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10년 뒤 나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악착같이 살아온 중고등학교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모두 헛수고가 되어버린 것만 같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니던 대학에 자퇴 신청서를 내고 재수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집은 도저히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사 온 지 반년 만에 또 한 번의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사 갈 집의 조건은 하나면 되었다. 독서실이 가까운 곳.  


가난한 사람들은 늘 분주하다는 말을
기어코 실현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급하게 이사를 오고 다시 급하게 이사를 나갔다.


어머니는 그렇게 다른 것은 자세히 알아볼 겨를도 없이 그저 집 앞에 독서실이 있으면서 월세가 저렴한 집을 찾았던 모양이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보급되어 어플 몇 번 클릭해서 원하는 정보를 추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아마 선택의 폭이 훨씬 넓었겠지만 기술이 보급되기 전, 그저 발품을 팔아 하루라도 빨리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 익숙한 것을 뒤적여보는 것이었을 테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오래도록 살았던 아파트 근처 어디 즈음으로 이사를 했다.


독서실이 정말 가까웠다. 집에서 나와 신호등만 하나 건너면 바로 독서실이었다. 독서실비 이외의 경제적 지원은 바라지 않았다. 아침, 점심, 저녁을 집에서 먹었고 강의는 EBS 무료 강의면 충분했다. 그 가까운 거리조차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아까워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이동시간은 1분이면 충분했다. 어차피 석 달 전까지 했던 공부 다시 감만 잡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목표는 정했다. 앉아있기만 하면 됐다. 어려울 것은 없었다. 시간은 흘렀고 원하는 대학에 합격을 했다.


하지만 합격을 선물해 준 이 집에서도 오래 지내긴 힘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벌레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새벽까지 공부를 하고 들어와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놈에 쥐와 바퀴벌레 기어 다니는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동틀 무렵까지 불을 켜 둘 수밖에 없었다. 불을 끄는 순간 벌레가 기어 나오는 것을 몇 번 목격한 뒤로 도저히 불을 끄고 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재수하는 동안 나의 생활패턴은 아침에 잠들고 오후에 일어나는 형태로 완전히 꼬여버리고 말았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독서실은 주거요건에 필요하지 않았다.


1년을 채 살지 못하고 또 한 번의 이사를 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이번 조건은 오직 하나, 벌레가 없을 것. 이번 이사는 벌레로부터 도망이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또다시 그 동네 복덕방 몇 군데에 부탁하여 집을 구해왔다. 옥상에 위치한 조악한 형태의 집이어서 처음에는 불안했다. 대학교 근처에서 6개월간 살았던, 쥐가 얼어 죽은 집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아보니 나름대로 괜찮았다. 일단 벌레가 없었기 때문이다. 앞선 두 곳의 집이 워낙 열악해서였을까 옥탑방임에도 불구하고 지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단 벌레는 예외로 하겠다. 춥고 더웠지만 그것은 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2년 정도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집 없는 자의 설움을 톡톡히 느끼게 해 준 집주인의 고약스러운 성품으로 인해 이 집과도 작별을 고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람 좋아 보이는 집주인을 선택의 우선순위로 놓았던 모양이다.


 새로이 이사 간 집은 1층에 주인이 살고 2층에 세를 내놓은 형태였다. 집주인 식구들은 모두 사람 좋아 보이는 외모와 풍채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집에서 대학시절의 절반의 시간을 보냈다. 하나만 빼고 다 좋았는데 그 하나가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것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정말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일이다.


주인집은 1층 입구 대문 앞에 사람만 한 대형견을 묶어놓고 키우고 있었다. 한데 가끔 그 대형견의 목줄이 풀려있을 때가 있었는데 아무리 풀지 말라고 요구를 해도 절대로 물지 않는 순한 개라며 오히려 역정을 내곤 했다. 주인의 말처럼 순했다. 단 주인이 함께 있을 때에만.


술을 마시고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올 때면 가끔 대문 앞에 목줄이 풀린 상태로 크게 짖어대고 있는 개가 무서워 문을 열지 않고 담을 넘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뛰어올라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게 우리 집을 가는 것인지 도둑질을 하러 가는 것인지 헷갈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결국 일이 터졌다.


담을 넘기는커녕 대문 앞에 개가 풀렸는지 묶였는지 확인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만취상태가 되어 집에 들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대문을 열고 터덜터덜 2층으로 향하다가 뒤꿈치가 이상하게 아프다고 느껴져서 뒤를 돌아봤더니 결국 그 개가 내 뒤꿈치를 물어버린 것이다. 취하면 용감해지는 것은 경험적으로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날은 정말로 용감했던 모양인지 뒤꿈치를 물고 있는 개를 그대로 발로 걷어차 버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집에 들어가서 씻고 잤던 것이 기억난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욱신거리는 발뒤꿈치를 부여잡고 주인집과 대판 싸우고 병원에 가서 파상풍 주사를 맞은 뒤로 우리는 또 이사 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주인과 같이 살지 않는 넓은 집.
이번 이사 갈 집의 콘셉트였다.


어떻게든 그 콘셉트와 맞는 집을 찾는다는 것이 일견 신기하기도 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조금씩 이상하지? 싶은 부분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는 이유는 뭐 다른 것이 있었을까. 돈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을. 옥상이 있는 오래되었지만 넓은 주택이었다. 자그마한 마당엔 감나무도 있었다. 많이 어두운 것 빼고는 나름 괜찮은 집을 구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여태껏 살았던 집들 중 가장 추웠고 가장 더웠다. 심지어 여름이 되자 온갖 벌레가 나오기 시작했다. 꼽등이와 달팽이를 마주하며 조금만 더 어릴 때 이 집에 왔더라면 내가 파브르가 되었겠구나 싶은 생각을 하며 내년 여름이 오기 전에 이곳을 탈출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파트를 떠나 8년 동안 온갖 허름한 주택을 돌아다니며 수중에 가진 돈으로 주택에 들어가 봐야 결코 좋은 꼴은 못 보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다음으로 이사 갈 곳은 무조건 첫째도 깔끔, 둘째도 깔끔, 깔끔한 것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기로 했다.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아버지가 시작한 새로운 일이 조금은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는지, 조금이지만 돈이 모이는 것 같아 보였다.


그리하여 다음 선택지는
신축 빌라로 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테트리스를 하듯 오밀조밀 빈틈없이 쌓아 올린 빌라 건물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많은 집에 사람이 가득 차있다는 것에 놀랐고 이 빌라들을 가지고 있는 주인의 숫자는 몇 명일까 생각하며 또 한 번 놀랐다. 


스무 살 이후 옮겨다닌 집들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을 머물렀다. 2년의 계약이 끝나고 한번 더 계약을 연장했던 것이 기억나는 것으로 보아 3년 혹은 4년 정도 거주했던 것 같다. 집을 계약할 때 아찔했던  에피소드가 하나 생각난다. 


스무 살 이후 돌아다녔던 집들은 대부분 월세였기에 목돈을 이체할 일이 없었던 것 같다. 한데 이번 빌라는 반전세로 얻게 되었다. 말이 반전세지 보증금이 높은 월세나 마찬가지인 것을 반전세라고 부르는 이유가 임대인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시작된 것인지, 세받으며 편하게 산다는 임차인에 대한 세간의 부러운 시선을 돌리기 위해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그 반전세 보증금은 여태껏 옮겨 다니며 살았던 집들의 보증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목돈이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게 큰 목돈을 한 번도 이체해 본 적 없는 통장 계좌를 가지고 있던 어머니는 이체한도라는 것을 알리 없었다. 계약서를 쓰러 부동산에 마주 앉아 계약금을 이체하려는 순간, 한도를 넘어선 금액이라는 문구를 보고 귀가 빨개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장 가까운 ATM기 앞으로 달려가 현금을 뽑아오겠노라고 말하고 어머니의 카드를 들고 뛰어가던 기억, 현금인출기 앞에 서서 백만 원씩 수십 번에 걸쳐 초조하게 현금을 뽑았던 기억, 그 돈을 어떤 특별한 보호장치도 없이 투박하게 돈봉투에 나누어 담아 들고 정신없이 부동산으로 뛰어 돌아갔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선명하게 각인되어 잊히질 않는다.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가난이 배경이 되는 당황은 이처럼 사람을 허둥거리게 만든다. 그 돈 봉투를 들고 이동하다가 소매치기라도 당했거나 불의의 사고라도 발생했다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해진다.


빌라에서 살았던 3~4년의 시간은 평온했다. 벌레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큰 행복이었고, 기름값을 아끼기 위해 물을 끓여 샤워하는 수고스러움을 덜어낼 수 있어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추위와 더위는 차라리 즐겁기까지 했으며 저녁 늦게 귀가를 할 때 으슥한 골목을 걸어 들어가며 느끼게 되는 경계심과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곳에 살며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고 결혼을 했다. 결혼과 동시에 나의 오랜 유목생활은 끝났다. 은행의 힘을 빌려 집을 구매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 첫 번째 집이 되어줄 신혼집을 계약하며, 집을 구매한다는 것이 서류 몇 장 끄적이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이토록 쉬운 일이었던가 싶어 기쁘기보다는 허무함이 먼저 피어올랐다. 처음 신혼집에 신혼살림을 하나하나 들여놓을 때마다 지금 내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정말 현실이 맞는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이렇게 평온하게 잠들고 상쾌하게 일어나본 적이 언제였는지, 아니 그랬던 적이 있기나 했었던 것인지 아주 까마득하게 느껴지며 현재와 과거가 모두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일처럼 느껴졌다.


내가 분가함과 동시에 본가 식구들은 아파트로 한차례 더 이사를 했으며 얼마 전 드디어 2년 뒤 완공될 신축 아파트 분양권을 하나 구입했다. 약 15년에 걸친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집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기쁘고 감격스러웠으며 두려웠다.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 어려움은 삶의 구석구석에서 앞으로 나가기 힘들게 발목을 잡아당겼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하릴없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게 만들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그 시절에서 조금은 벗어나게 된 것 같다. 결코 그 시절이 그립다거나 다시 돌아가고 싶은 종류의 기억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다만 그 시절은 분명한 나의 삶이었고 그 과정이 있었기에 나의 삶 속에 스며들게 된 여러 태도들이 있을 것이다.


삶은 언제나 양면성으로 가득 차 있다. 고난을 겪어낸 후유증으로 좋지 않은 형태의 습관들이 남아있을 테지만 그렇기 때문에 얻게 된 좋은 형태의 모습들도 분명히 나의 삶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


가난 자체는 죄가 될 수 없다. 다만 가난이 빚어낸 못난 것들을 나의 몸과 마음에 누더기처럼 걸쳐두었을 때 그것은 악취를 풍긴다. 아직은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한 나의 과거이지만 조금 더 세월이 흐른 뒤에는 보다 숙성된 형태로 무르익어 악취가 아닌 향기가 되어 나의 삶 안팎으로 새어 나오기를 고대하고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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