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리라 Dec 18. 2024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나에겐 지독하게 향수병에 시달리던 시기가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에게는 막연히 서울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태어나서 20년이 넘도록, 고향인 익산 지역을 떠나서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태어나고도 강산이 두 번 이상은 변했을 텐데도, 여전히 버스 한 대 들어오지 않는 우리 동네가 지긋지긋했는지도 모른다. 그 흔한 구멍가게 하나 없고 논과 밭의 풍경만 가득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동네였다. 


그래도 어렸을 적엔 깨끗한 물이 흐르는 냇물에서 물고기도 잡고, 종이배를 접어 띄우거나, 신고 있던 고무신을 벗어 물에 띄우고 놀다가 잃어버리는 등 사소한 사건들로 소란스럽기도 했다, 그런 소소한 놀이들은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마을에 어느 기업의 공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로 새마을 사업이라도 하는 것처럼 몇 날 며칠을 땅을 갈아엎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우리가 발 벗고 놀던 때 묻지 않았던 작은 냇가들이 모두 사라지고 하나의 큰 수로가 생겨났다. 분명 우리 마을도 더 좋아지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큰 수로가 있던 자리는 원래도 큰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여름이면 그곳에서 헤엄도 치고 그물망을 던져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기도 했다. 하지만 공장이 가동되고 나서 그 물은 점차 시커멓게 변해가더니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이상 그곳에서 물장난을 칠일도 물고기를 잡을 일도 없었다. 우리 마을이 좋아진 것이 있다면 그 공장으로 향하는 차량이 이따금 마을을 지나갈 수 있도록 마을길을 조금 넓힌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렇다고 버스가 들어오지도 못하는 길일 뿐이었다.


걸어서 학교에 가는 길은 어린 나의 걸음으로 한 시간이 넘는 고된 길이었다. 왕복 두 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그 길을 초등학교, 중학교 9년이나 걸어서 다녔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는 1년을 통학을 했는데, 학교를 가는 데만 1시간 40분쯤 걸리는 길이었다. 갈아타야 하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더하면 2시간이 더 걸리는 시간이었다. 도저히 통학은 안 되겠기에 부모님의 승낙을 받아 언니와 둘이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며 고등학교를 다녔다. 학교가 코앞이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학교가 가까웠는데,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나는 무엇을 하든 코 앞에 있는 곳을 가는 게 좋았다. 병원도, 운동도, 공부도, 일도 되도록 집과 가까운 곳을 제1순위로 택하는 버릇이 생겼다. 


서울에 가서 살아야겠다던 바람은 결혼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남편이 하는 일이 대부분 서울 쪽에 몰려 있어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친정에서 하룻밤을 자고 서울로 올라가던 날 나와 엄마와 새언니와 언니들은 울었다. 뭐가 그리 슬펐는지 그냥 누군가의 울음을 시작으로 다 같이 울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짧은 울음 후 나는 소풍 가는 아이처럼 설레고 신나는 마음으로 서울로 향해 나아갔다. 


서울생활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문을 열고 나가면 버스정류장이 있었고, 조금만 걸어가면 지하철역이 있는 편리한 생활이었다. 우리는 상가 2층 원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11평쯤 되는 방이었는데 창문이 부엌 쪽으로 하나, 침대 옆쪽으로 난 작은 창문 하나가 있었고,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기다란 방이었다. 남편이 출근을 하고 나면 집안 정리를 하고, 장을 보러 마트에 갔다가, 저녁 준비를 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남편의 퇴근 시간만 기다리고 있는 외로운 새댁이었다. 동네에 아는 사람은커녕 서울 전체 어디에도 아는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없었다. 명절이 되면 고향 가는 길이 무척 고되었지만 그리운 사람들을 보러 간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훈훈해지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두세 번쯤의 명절을 보냈던 것 같다. 언제부턴가 남편이 출근을 하고 나서 밥상을 치우고 나면 침대에 눕게 되는 일이 잦아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랜 외로움에 생긴 우울증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는 우울함을 느낄 수조차 없는 시기였던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나는 행복했고 내가 이루던 서울 생활까지 하게 되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우울이라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은 출근을 하고 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는데 내 귓가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얼핏 들리는 것 같았다. 몸을 돌려 움직이려 했는데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잠들기 전 남편 생각을 잠깐 했었는데 꿈을 꾸게 된 건가 싶었다. 그러다 갑자기 등 뒤에서 남편이 나를 껴안는 느낌이 들었다. 내 목덜미 쪽으로 남편의 감촉이 느껴졌다. 남편은 출근을 했고 이건 꿈인 것 같은데, 너무도 현실 같은 감촉에 화들짝 놀라서 잘 떠지지 않는 눈을 힘을 줘 부릅떴다. 남편은 당연히 없었다. 식은땀이 났다. 너무 겁이 나서 출근하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집에 왔다 간 것은 아닌지 확인까지 해봤다. 꿈을 꾼 것이겠지. 그렇게 그날의 꿈은 잊혀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또 힘없이 침대에 누워서 잠시 친구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친구가 부르는 것 같아 눈을 뜨고 침대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내 친구가 침대 맡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은 꿈이라고, 깨어나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내 몸은 더욱 얼어붙었다.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눈을 떠보려고 해도 잘 떠지지 않았다. 한참을 힘겹게 몸부림을 치다 겨우 눈을 떴다. 식은땀을 흘리고 호흡이 가쁜 내 모습만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꿈이 분명했는데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공포감이 몰려왔다. 왜 사랑하고 그리운 이들이 공포의 대상으로 나에게 나타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인터넷으로 이런 비슷한 현상이 있나 찾아봤다. 가위눌림이라는 익히 들어봤던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위눌림이 또 있을 까봐 잠을 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집안에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서 그런가 싶어 햇빛이 들어오는 곳에 있어 보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어김없이 잠이 들려고 하면 가위눌림이 시작되려고 해서 겨우 눈을 움직여 정신을 차리곤 했다. 그러다가 또 설핏 잠이 들어버렸는데 잠들기 전 엄마 생각을 했었다.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길래 눈을 떴더니 천장에서 엄마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고 싶은 엄마가, 친구가, 남편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온갖 노력 끝에 빠져나오긴 했지만 나는 기진맥진했다. 그 뒤론 거의 낮잠을 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혼자서 긴 시간을 지내다 보니 그런가 싶어 남편은 근처에서 할만한 일이 없는지 찾아보는 걸 제안했다. 나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 일을 배우러 갔다 온 날,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느라 손에 덴 상처를 보고 남편은 그 일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나도 인정했다.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힘들었다. 


어느 날, <향수>라는 노래가 어디에선가 들려왔다. 이 노래는 내가 좋아하는 정지용 시인의 <향수>라는 시를 가사로 해서, 가수 이동원 씨와 테너 박인수 씨가 함께 부른 곡이다. 익히 알고 있었던 노래였다. 그런데 그날은 그 노래가 들려오던 순간부터 전기에 감전된 듯 옴짝달싹 할 수없이 노래에 빠져들었다. 가사 하나하나가 나의 어렸을 적 고향을 생각나게 했고, 엄마 아빠와 가족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곳의 생활이 지긋지긋해서 떠나왔는데, 나는 지금 그곳을 너무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 /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시용 시인, 향수 中 일부>


노래를 듣는 동안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결국 엄마를 수도 없이 부르며 목놓아 울었다. 너무나 보고 싶고 그리웠다. 나의 가족과 나의 추억과 나의 엄마 아빠가 있는 그곳이. 이것을 깨닫게 해 주려고 그런 무시무시한 가위눌림에 시달리게 했었나 보다. 고향을 떠나와 서울에서 살림을 차리고 마냥 행복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나는 행복했지만 외롭기도 했고 그리운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고향의 하늘이 그리워서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앓았던 모양이다. 




그곳에서 2년쯤 살다 방이 3개 있는 밝고 깨끗한 신축 오피스텔로 이사를 갔고, 거기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나는 기쁨도 얻었고, 나의 가위눌림 증상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고향을 향한 나의 그리움은 지금까지도 계속 커져만 가고 있다. 어떤 이유로 해서 나는 고향을 자주 가지 못하는 처지에 놓였고, 향수병은 때때로 나에게 찾아오는 고질병 같은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처럼 두렵고 힘들게 찾아오진 않는다. 그럴 때면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꺼내어 읽기도 하고 노래를 들으며 어릴 적 기억에 남아있는 고향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이제 가위눌림만큼이나 희미해져 가는 고향의 기억들을 애써 건져 올려보려고. 하나라도 더 기억해 내려고 발버둥 쳐본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시절이고 환경이기에 더욱 그리움은 짙어질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