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카페 이야기
작년 1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극장에 개봉했다. <슬램덩크>하면 1990년대 만화를 좋아하던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남녀 모두에게 인기 있었던 일본의 농구 만화다. 이 만화영화는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영화 중 순위 권 안에 드는 큰 성공을 거뒀다. 우리 가족도 다 같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남편과 나는 어렸을 적 읽었던 추억으로, 딸은 만화카페에서 읽었던 추억으로, 모두 들뜬 기분이 되어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만화는 추억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학창 시절 만화를 보는 재미는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즐거운 일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르네상스, 댕기, 윙크 등 순정만화 잡지가 발행되는 날에 맞추어 잡지를 사고 서로 돌려 읽었다. 요즈음의 오픈런과 비슷한 장면처럼 먼저 읽겠다고 줄을 서는 게 일이었다. 나는 그중 윙크 잡지의 만화를 특히 좋아했었다.
어른이 되면 아무래도 만화책을 보는 일은 거의 없어진다.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다 보면 만화책을 읽는 것은 판타지 같은 일이 되어버리곤 한다. 우리 부부는 휴가철이나 연휴를 맞이하면 동네 비디오가게에 들러 쉬는 동안 읽을 분량의 만화책을 빌려와 탑을 쌓아놓고 읽곤 했었다. 그야말로 판타지 같은 휴일을 보내는 것이다. 더운 여름날이나 추운 겨울에는 어설픈 외출보다 훨씬 좋은 휴식이 되곤 했다. 둘 다 만화책을 좋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딸이 학습만화책을 좋아하게 되었을 때는 주말마다 만화박물관에 가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만화 삼매경에 빠지다 오곤 했다. 만화박물관에는 온갖 만화들이 다 소장되어 있었다. 어떤 만화책들은 문화재처럼 자물쇠를 열어서 꺼내 주곤 했었다.
어느 휴일 우리 가족은, 다 같이 갈만한 분위기의 만화방을 찾아봤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예전 만화방의 분위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만화방이 있었다. 우리는 각자 좋아하는 만화책을 찾았다. 낡은 책들이 많은 것으로 봐서 오랫동안 운영된 만화방인 것 같았다. 예전과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와보지 못했을 텐데. 그날은 소파도 불편하고 책도 많이 낡아서 아이에게 우리 시절의 만화방 이야기를 해주면서 일찍 마무리를 지었다.
우리는 다시 아이와 함께 갈만한 만화방이 있는지 찾아봤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는 없었는데 옆 도시 번화가에는 만화카페라는 것이 있었다. 두 곳이 검색이 되었는데 우리에게 좀 더 가까운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만화카페에 도착했을 때 세련된 실내를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만화방이 민박이었다면, 만화카페는 약간 호텔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각각의 방처럼 구분이 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책을 볼 수 있었다. 2층은 다락방처럼 몇 개의 계단을 올라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아이들에겐 2층 다락방이 인기가 있는 것 같았다. 우리도 2층에 자리를 잡고 각자의 만화책을 골라보았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화카페라서 그런지 책 상태가 대부분 괜찮았다. 절판되어서 구하기 힘든 만화책만 구권으로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한참 웹툰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는데 웹툰도 만화책으로 나와서 화려하게 한 구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추억의 순정만화를 꺼내 들고 와서 자리를 잡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낯선 풍경에 자꾸만 시선을 뺏겨서 그날 만화책은 거의 읽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내가 만화책을 접하지 않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인터넷으로 만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이 되고 나서도 나는 만화를 거의 보지 않았다. 그때는 종이책이 아닌 전자책이나 웹툰으로 책을 본다는 것이 어색했고 불편했다. 그런데 이렇게 웹툰이 종이책으로 나오니 정말 반가운 일이었다. 남편도 이런 변화를 직접 눈으로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카페 사장과 무슨 대화도 나누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날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만화방이 사라지고 만화 대여 가게도 거의 사라져 가고 있는 지금 만화 산업은 웹툰을 비롯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런 변화의 기류에 올라타기로 결정한 것은 그 만화카페를 방문하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우리 지역에는 아직 만화카페가 없어서 빨리 선점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일사천리로 사업을 진행시켰다. 가게 이름도 직접 짓고, 이용 요금도 프랜차이즈 요금보다 낮게 책정했다. 대신 우리는 먹는 것에 대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많이 약했다.
우리의 아기자기한 만화카페가 드디어 오픈을 했고, 남편의 예상대로 새로운 문화는 빠른 속도로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가게를 확장하고 아르바이트생도 뽑고 주말에는 자리가 부족해서 대기번호까지 적어야 했다. 만화카페는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사업 아이템이어서 중고 만화책 수요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절판된 어떤 만화책들은 구하기 어려운 책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한 <슬램덩크> 책은 새로운 책을 살 수 없어서 중고를 알아봐야 했는데, 그 마저도 구하지 못해 지인이 읽던 책을 가까스로 구해서 진열을 해야 했다. 지금은 프리미엄 전권 세트 가격이 비싸게 팔리고 있는 것 같다. 그때 낡은 책으로 라도 소장하고 있을 걸 하고 지금에 와서 후회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만화책은 속 내용은 흑백이지만 커버는 컬러로 제작된다. 커버 이미지는 아마도 해당 권의 내용에서 핵심이 되는 장면이나 등장인물의 그림이라 더욱 신경 써서 그려졌을 것이기에 진열할 때 멋지게 활용할 수 있었다. 웹툰 만화책은 모든 페이지가 컬러로 만들어져서 나온다. 그래서 일반 만화책보다 가격면에서 많이 비싸다. 웹툰은 다채로운 색상과 개성 강한 이미지로 앞면이 보이게 진열을 해 놓으면 한 편의 화보 와도 같아 보인다. 이렇게 곳곳에 만화책의 앞면이 보이도록 진열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조금 더 끌어 모았다. 지금도 우리 집 책장에는 종종 여러 권의 책이 앞면으로 진열이 되어있다. 아이가 어렸을 적 그림책을 앞면이 보이도록 진열한 적은 있었지만, 일반책이나 만화책을 앞면 진열한 것은 만화카페를 거쳐서 생긴 습관이다.
만화책의 구성은 일본 작가의 만화책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웹툰 시장이 커지기 전에는 대부분 종이 책 만화는 일본 작가의 만화를 많이 접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에 읽었던 우리나라의 만화책과 지금 웹툰 만화책 사이의 간극이 조금 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웹툰 시장은 그때보다 훨씬 더 커지고 소재도 다양해져서 드라마의 콘텐츠로 뜨거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면, 만화의 위상이 많이 격상된 것 같아 기쁜 마음이다.
만화카페를 운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딸아이에게 만화책이 무방비로 노출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만화책을 좋아하는 딸은 모든 책을 다 섭렵할 기세였다. 15세 기준으로 맞춰서 볼 수 있는 책의 구역을 정해서 읽게 했다. 15세 가능한 책이어도 우리의 정서상 잘 맞지 않는 만화책은 제외로 하기도 했다. 딸은 한 해가 넘어갈 때마다 볼 수 있는 책의 규제를 조금씩 풀어달라고 요청했고, 딸의 성장과 함께 만화책의 규제도 당연히 조금씩 범위가 줄어들었다. 그때 딸과 함께 <원피스>라는 일본 만화책에 푹 빠져서 신간이 가게에 입고되는 날에는 서로 먼저 보려고 소란스러웠었다. 그때의 인연이 되었던 만화책들은 지금까지도 딸과 함께 집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자주 보곤 한다. 또 매년 <명탐정 코난> 극장판이 개봉하는 날에는 같이 영화관 나들이도 하고 있다. 그래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20여 년의 침묵을 깨고 극장판으로 개봉을 한다고 했을 때 온 가족이 들떠서 관람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많은 에피소드를 안겨준 만화카페 운영은 주변 곳곳에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프랜차이즈 만화카페 개업으로 폐업을 하게 되었다. 그 사이 이미 만화카페는 성장하여 팽창할 대로 팽창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가 폐업을 결정할 당시 이미 폐업하는 만화카페가 많아서 만화책을 중고책으로 사들이는 곳이 그리 많지 않았다. 개업을 준비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우리는 많은 만화책들을 지인에게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그때 우리 딸은 챙기지 못한 소중한 만화책을 보면서 침울한 표정을 지었었다. 나 역시 마음이 씁쓸하긴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가게를 처분해야 하는 일은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가게의 모든 짐을 다 빼고 다락방을 철거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친구들을 초대하여 캠핑하는 기분으로 1박을 하며 보냈다. 친구들에게 각각 다락방 한 칸씩 내어주고 추운 겨울날 난방도 없이 가져온 옷을 덮고 잤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도 친구들은, 추웠지만 좋은 기억이었다고 해서 휑한 마음이 많이 채워졌었다. 만화카페 다락방 철거 전, 친구들과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를 남길 수 있게 되어 기뻤다. 그들에게도 추억을 선물해 준 것 같아 좋은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만화는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리 좋지 않은 인식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만화방을 다니는 것도 소위 좀 노는 친구들이 다니던 곳으로 여겨졌었다. 탈선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만화의 위상은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슬램덩크> 전 권을 구입하려면 꽤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내 가게가 생기고, 책을 진열할 수 있는 공간이 허락된다면 만화책을 꼭 다시 진열해놓고 싶다. 추억으로만 그치지 않은 만화책이 곳곳에 있다면 나의 책장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만화 영화를 다시 보고 있자니, 사람들에게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는 만화책을 선물해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