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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May 19. 2024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반과 스메르자코프





연극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반과 스메르자코프

공연장소 : 대학로 TOM(티오엠) 2관

공연기간 : 2024년 5월 16일 ~ 2024년 5월 26일

관람시간 : 2024년 5월 18일 오후 3시




    만약 최근 들어 내 연극 감상 몇 편을 연달아 읽어본 사람이 있다면 이 인간은 도대체가 속이 비비 꼬여서 다른 사람 공연에 대해 함부로 트집이나 잡고 잘난체하면서 모욕이나 할 줄 알았지 좋은 말이라고는 단 한마디도 할 줄 모른다고 나를 나무랄 것이다. 조목조목 틀린 말은 아니다. 원체 내 됨됨이가 그렇거니와 감상글을 굳이 여러 번 다듬는 성의도 없어서 다소 경솔하고 거친 글이 올라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솔직할 뿐이다. 거짓말을 하거나 악의적이지는 않다. 무엇보다 사회적 영향력이라고는 제로인 내가 굳이 예의를 차리거나 자기 검열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도 도대체가 비비 꼬여서 공연에 대해 함부로 트집이나 잡고 잘난체하면서 모욕이나 할 줄 알았지 좋은 말이라고는 단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짓을 다시 한번 하려고 한다.

    처음에는 이 연극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이 극단의 '고전 명작 소설 연극 시리즈' (내가 붙인 이름이다)를 좋아하지 않는다. '대심문관과 파우스트'를 재미있게 보았기 때문에 몇 편 더 보았지만 언제나 크게 실망했고 '세 자매 죽음의 파티'에서 그 정점을 찍으면서 그 뒤로는 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반과 스메르자코프'는 내가 전에 보고 싶다고 언급한 적도 있었고, 또 친애하는 도스토옙스키를 믿고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전해 보기로 했다.   

      앞에서도 이미 분명히 밝혔듯이 이번 글은 비평이 아니라 비판에 가깝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 극단의 '고전 명작 소설 연극 시리즈'를 어느새 4편이나 보았기 때문에 이번 공연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더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일단 첫 째로는,  과연 제작진들이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해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아니, 그보다 얼마나 깊이 교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어렸을 적 돌연 학구열에 불타올라 100권짜리 고전 명작 전집 세트를 지르고는 도장 깨기 식으로 1권부터 순서대로 읽어나가듯이 (그러다 중간에 나가 떨어지고 말지만), 이 제작진도 그저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지고 명망 있는 작품을 도장 깨기 식으로 격파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스럽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모르겠고,  되는 대로 모든 걸 다 말하고 있기에 혼란스럽다. 마치 이런저런 해석집에서 그럴듯한 문장들을 있는 대로 잘라 모아 단 하나도 버리지 않고 짜집기 한 것처럼 말이다. 일관성도, 신선함도, 개성도 없는 풍성함은 피로감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부조리와 난잡함은 다른 것인데 그 둘을 전혀 구별하지 못하는 듯하다.

    둘 째는 자기 복제의 심각성이다. 나 역시 '대심문관과 파우스트'를 재미있게 봤던 사람이지만 제작진들이 '대심문관과 파우스트'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 뒤로 이어진 모든 시리즈는 '대심문관과 파우스트' 자가 베끼기로,  '대심문관과 파우스트 시즌 2' '대심문관과 파우스트 시즌 3'  '대심문관과 파우스트 시즌 4'.... 일 뿐이다. 심지어 이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반과 스메르자코프'에서는 '대심문관과 파우스트'에서 나왔던 대심문관이 또다시 나온다. 대사도 거의 그대로이고 장면을 거의 잘라 붙이기 한 수준이어서  어처구니가 없다. 더군다나 이 번 연극의 맥락이나 메시지와는 어울리지도 않는다. '파우스트'에서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나 모두 신과 악마라는 소재가 나오니 그냥 적당히 잘라서  연결하면 되겠거니 하는 안일한 생각에서 그리한 모양인데, 이건 거의 관객을 농락하는 수준이다.  솔직히 말해서 제작진들은 '파우스트'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차이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듯했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그저 '파우스트'의 속편 정도로 다루는 것 같았다. 대 문호 도스토옙스키에게 이 무슨 실례인가.

   셋 째는 이 시리즈의 연극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루한 예술적 허영이다. 개인적으로 연극에 음악, 춤, 영상,  퍼포먼스, 행위 예술 등등이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걸 좋아한다. 그런데 그것들은 각각 그 자체의 진동과 그 자체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어서 다루기가 어렵기 때문에 신중하고 적절하게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연극에서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모든 걸 다 때려 넣고 있다. 다다익선이라는 걸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모르겠고 모든 걸 다 말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러 매체들과 과도한 자극들까지 난립하니 정말이지 멀미를 일으킬 지경이다.  그것은 예술적인 게 아니다.  심지어 예술적인 척하는 것조차 아니다.  예술적인 척하는 모방품을 다시 재모방하는 것에 가깝다. 한 마디로 너무 촌스럽다는 뜻이다. 마치 몇십 년 전에 발간된 패션 잡지에 나온 모든 패션 코드를 한 번의 옷차림에다가 모조리 구현한 것처럼 말이다. 촌스러운 것 10개를 모아 놓는다고 해서 세련된 하나가 될 리가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신과 악마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물론 대화에서 그런 주제와 의문들이 오가긴 하지만 그것은 카라마조프 가문이 신과 악마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신과 악마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악마적'인 것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악마가 아니며 기독교의  인격적 악마로 상징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카라마조프 가문이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악마적인 모방이다. 표도르, 드미트리, 이반, 스메르자코프 등은 서로서로를 끊임없이 모방하고 서로의 욕망에 끊임없이 불을 지피면서 서로에게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지옥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같은 여자를 사랑하거나 같은 재산을 탐내거나 같은 죄를 저지르거나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 오직 자신의 실존과 권리만을 주장한다. 오직 알료샤만이 그 모방에서 벗어나 그것이 인위적인 지옥임을 증언한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이며 자극적인 주제인 '근친 살해'는 사실상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이들이 가족으로 한정되었기에 '근친' 살해가 되었을 뿐, 일단 이 모방의 광풍이 불어오면 어느 집단에서든 누구에게나 살인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살해당한 것은 표도르이고 살해한 것은 스메르자코프이지만 이 모방의 연쇄 속에서는 그 누구든 죽을 수 있고 그 누구든 죽일 수 있다.  이것은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죽여야만 비로소 끝나는 지옥으로, 어쩌면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세 명, 네 명, 구성원 모두가 다 죽을 때까지 계속될 수도 있다. 이들 중 이반만이 (아마도 스메르자코프도 함께) 이 지옥의 원리를 꿰뚫어 보고 있거나 직감하고 있지만, 그 역시 저주 받은 카라마조프 가문의 한 명으로써 이 중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이반이 스메르자코프로 하여금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도록 (그것이 암시든, 종용이든, 허락이든 간에) 한 것은 이 모방의 원천을 (혹은 가장 강력한 모방 기제를)  제거함으로써 모방의 연쇄와 과열을 끝내고 그나마 (자기 자신을 포함한) 다른 구성원들을 보존하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스메르자코프는 왜 자살했을까. 그는 이제 더 이상 모방할 사람이 없기에 그 누구도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는 누구보다 집요한 모방을 통해 카라마조프 가문의 엑스트라에서 주인공의 자리에 까지 올랐지만 살인이라는 클라이맥스를 끝으로 결국 연극은 끝이 난 것이다. 

    이것은 내 해석일 뿐 유일한 해석은 아니며 이 연극이 꼭 이렇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연극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보여주는 대사가 나오긴 한다. 단지 스쳐 지나갈 뿐이지만.  한 연극에 너무 많은 관점이 나열되고 있어서 일일이 지적하기는 힘든데, 가장 황당했던 건 후반에 연극이 갑자기 진범이 누구냐를 파헤치는 심리 스릴러가 되었다는 것이다. 스메르자코프가 아버지를 죽일 거라는 사실을 이반이 알았느니 몰랐느니, 알면서도 몰랐고 몰랐으면서도 알았다느니, 의식적인 무의식이니 무의식적인 의식이니 하는 정말이지 쓸데없는 내용이 길게도 늘어지면서 갑자기 스메르자코프는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카이저 소제나 영화 '프라이멀 피어'의 에런이 되어 이중인격이 작열하는 열연을 선보인다. 스메르자코프가 아버지를 죽일지 이반이 알았느냐 몰랐느냐, 이것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언급하는 순간 모든 게 유치 찬란해진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서 말이다.       

    개인적으로  '고전 명작 소설 연극 시리즈'를 앞으로 또 보게 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정말이지 충언을 드리건데, 이제 이런  시리즈는 그만 하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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