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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May 12. 2024

[연극] 에브리우먼




연극 :  에브리우먼

공연장소 :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공연기간 : 2024년 5월 10일 ~ 2024년 5월 12일

관람시간 : 2024년 5월 11일 오후 3시




    세계가 산업화, 대중화된 이후로, 그리하여 예술이 산업화, 대중화된 이후로, 그리하여 대중이 예술의 전적인 소비자가 된 이후로, 예술은 수준이 더 높아지고, 질이 더 좋아지고, 더 풍요로워졌을까. 분명 일면 그렇다. 누구도 이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앞 문장에서 '일면'이라는 단어를 빼기는 망설여진다. 

     상대주의적으로 다변화된 소비자 대중은 이제 자신이 가진 파시즘적 권력의 힘을 잘 알고 있고 예술가들 역시 그렇다.  그리하여 이제는 대중이 예술가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대중을 모방한다. 대중에게 아부하고, 읍소하며, 엎드린다. 하지만 이것은 유별나거나 별다른 일은 아니다. 권력에게 반항하는 예술의 이미지는 최근 들어 조작된 것으로, 예술은 한 번도 권력에게 순응하지 않은 적이 없다. 지금의 예술 역시 귀족 권력에서 부르주아 권력으로, 다시 대중 권력으로 갈아탄 것뿐이다. 예술이 대중의 편이라고 해서 결코 반골이나 반(反)권력은 아닌 것이다. 사실상 예술만큼 속물권력지향적인 분야는 없다.

     우리가 지난날 사랑하고 숭배하고 모방하고 시기하고 증오했던 천재들의 비범한 예술은 더 이상 없다. 오늘날 예술은 대중을 예술적으로  계몽하거나, 선도하거나, 깨달음을 주거나, 지평을 확대하거나, 강조하거나, 제안하는 등의 모든 야심을 버렸다. 그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혹여 자신들이 대중보다 더 잘난 체할까봐, 대중을 무시하는 인상을 줄까봐 두려워한 나머지 신경쇠약에 걸렸다. 자신도 그저 평범한 사람임을 주장하고 또 강조하면서 평범한 사람보다 더 평범해지려고 갖은 애를 쓴다. 이제는 오히려 대중이 예술을 계몽하고, 선도하고, 깨달음을 주고, 지평을 확대하고, 강조하고, 제안한다. 누구에게나 '천재'라는 말을 남발하는 오늘날, 진짜 천재들은 범죄자들이나 다름이 없다. 마치 법 앞에, 민주주의 앞에, 경쟁의 기회 앞에 만인이 평등하듯이, 예술 앞에서도 모두가 평등해야만 한다.  

      과연 어디까지가 일상이고 어디서부터가 예술일까. 오늘날 우리가 잃은 것은 이것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이 질문 자체이다. 아무도 더 이상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촌스럽기 때문이다. 이제는 일상이 예술이고 예술이 일상이다. 이 광고 문구 같은 신조에 오늘날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예술이 필요할까. 이론적으로 더 이상 예술은 필요치 않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더 이상 예술이란 없다. 지금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상 옛 시대의 유물이나 추억의 잔재에 불과하다. 이제 모든 예술은 언제나 일상보다 한 발 뒤처져 있다. 영감과 예언과 냉담함을 상실한 오늘의 예술은 일종의 고고학일 뿐이다. 이제 가장 훌륭한 예술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예술, 특별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예술, 한 명도 빠짐없이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예술이다. 이제 예술은 반(反) 예술이 아니라 비(反) 예술이다.  

      내가 이런 쓸데없는 얘기를 길게도 늘어놓는 것은 사실 이 연극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공연 팸플릿에 올려져 있는 소개글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보려 한다.

    [중세 도덕극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휴고폰 호프만슈탈의 연극 '에더만'을 원작으로 삼고 작품의 큰 틀을 가져오되, 인간이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죽음을 현실적인 관점으로 풀어낸다. 췌장암 말기를 선고받아 죽음을 앞둔 여인 헬가 베다우스가 스크린으로 등장하고, 배우 우루시나라르다가 무대에서 극을 이끄는 가운데 두 사람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교차된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삶과 죽음, 고독과 연대를 다룬 두 여인의 대화는 인간의 실존과 본질을 돌아보게 한다.]

   그럴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나 연극에 대한 설명이 실제 그 연극 자체보다 더 그럴듯할 때 일어난다. 만약 당신이 이 소개글을 읽었다면 직접 이 연극을 보지 않아도 무방하다. 똑같은 얘기니까. 몇 줄의 글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왜 굳이 극장까지 가서 봐야 한단 말인가.

   소개글에 적혀있는 데로 실제 췌장암 환자 헬가가 공연장 스크린에 등장한다. 그녀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으로 자신의 젊은 날, 가족,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얘기한다. 직접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헬가가 이미 생을 달리했다는 사실을 관객들은 알 수 있다. 

     나는 바로 앞 문단에서 이 연극의 소개글을 읽는 것과 이 연극을 보는 것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분명 차이가 있다. 헬가는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그러나 그것은 이 연극 때문이 아니라 그저 내가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평범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그 평범함에 이 연극은 이토록 평범하게 편승한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그 평범함을 위해서 굳이 극장에 갈 필요는 없다. 근처 대형 병원만 가도 이 보다 더 진지하고 더 필사적이며 더 평범한 이야기들을 한 트럭은 만날 수 있다. 아니, 멀리 병원까지 갈 것도 없다. 요즘 암 환자 한 명 없는 집 안이 있던가. 이 연극을 볼 돈으로 음료수라도 사서 그 환자에게 병문안을 가라. 그러면 1000배는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 연극이 필사적으로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평범함의 평균 수위를 넘지 않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대중화된 평범함의 평균 수위를 가늠할 수 있다.

   이 연극은 재미가 없다. 영감이 없다. 야심이 없다. 개성이 없다. 상상력이 없다. 재능이 없다. 재치가 없다. 문학이 없다. 모욕이 없다. 용기가 없다. 진지함이 없다. 다만 누구나 다 함께 똑같은 것을 느낄 수는 있다. 누구나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을 누구나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방식으로 누구나 너무나 잘 알 수 있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요즘 토크 콘서트가 유행하는 것도 같은 이유인데, 이 연극은 토크 콘서트의 요지를 정확하게 실행하고 있다. 평범해지기를 원하면서 평범한 척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함을 강요당하면서 평범함을 과시하는 것. 이것은 유권자들의 연대 의식의 대중화인가, 아니면 선한 파시즘의 대중화인가. 하나면 하나지 둘이겠느냐를 모두가 함께 외치며 넘치는 공감의 인간애 속에서 다 함께 손에 손을 맞잡고 웃고 우는 모습은 아름다운가 아니면 기괴한가.    

     아니, 오히려 반대로 우리는 자신의 평범함과 일상적인 연대감을 느끼기 위해  몰아치는 비바람을 뚫고 구태여 공연장을 찾아야 할 정도로 그토록 똑똑하고 특별하고 오만한 세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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