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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Apr 14. 2024

[연극]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

 



연극 :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

공연장소 :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공연기간 : 2024년 4월 13일 ~ 2024년 4월 21일

관람시간 : 2024년 4월 13일 오후 3시



    

    예술은, 그러니까 취미가 아닌 작품으로의 예술은 재능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 문장에서 주어를 '예술가'가 아닌 '예술'이라고 하였다. 첫째, 나는 예술가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둘째, 예술가와 그의 창작물인 예술 작품의 재능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나는 예술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슬쩍 피하려 한다. 나는 여기서 '재능'에 대한 정의 역시 내리지 않겠다. 어떤 정의든 상관없기 때문이다. 어떤 재능이든지 간에 예술에는 재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예술 작품에서 아무런 재능이 느껴지지 않을 때, 너무나 진부하고 또 진부하기만 할 때, 너무나 뻔해서 하나마나한 얘기일 때, 나는 충격을 받는다.

     미리 밝혀두건대, 나는 이 연극에 대해 좋은 점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점이 있는 데 밝히지 않는 것인지, 좋은 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인지에 대해 구구하게 적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일단 이 연극 제목에 나오는 '오이디푸스'는 낚시에 불과했다는 것을, 시원하게 낚인 사람으로서 분명하게 밝혀둔다. 이 연극에서 '오이디푸스'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얄팍하게 찍어 바른 것에 불과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연극을 더 지저분하게 만다. 그래, 이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말이 나온 김에 오이디푸스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

   이 연극은 이방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와서 살게 된 난민, 이주노동자, 국제결혼자, 불법 체류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오이디푸스 역시 - 알고 보면 친부모님이 테베 사람이기는 하지만 -  테베 사람이 아닌 이방인이었다. 테베에 역병이 돌았을 때 그가 범인으로 지목된 것도 그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사악한 죄를 저질렀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동침했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모든 것이 전도되어 있다. 오이디푸스가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가 이미 죄인, 이방인이라는 죄인이었기에 결국 그의 죄가 밝혀진 것이다. 우리는 그의 끔찍한 죄가 신들을 노하게 하여 역병이 내렸다는 거룩한 합리화에 휩쓸려가서는 안된다. 신화는 자신들의 희생양을 사회적, 심리적으로 정당화시키는 신성한 방식이다. 신들은, 혹은 테베의 주민들은, 설사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어머니와 동침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방인인 오이디푸스를 제물로 삼았을 것이다. 자, 여기 죄인이 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죄를 밝혀낼 것이다. 그럼 거기에는 반드시 죄가 있기 마련이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였든 죽이지 않았든, 어머니와 동침을 했든 하지 않았든 신화는 어떤 식으로든 완성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의 끔찍한 죄가 신화를 더 극적으로 정당화시켜 주었을 뿐.

   그러니 이 연극이 이방인과 오이디푸스를 연결시킨 것은 정당하다.  그리고 이 부분에 좀 더 집중했어야 옳았다. 그런데 이 연극은 별안간 뜬금없이 오이디푸스를 죄 없는 자라고 선언한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 그의 죄가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몰랐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니 아니, 오히려 그야말로 그 누구보다 피해자라는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 자가 피해자라고?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단어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이다. 폐륜이라는 자극적이고 흔치 않은 사례에 감정적으로 압도되어 있다. 물론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죽인 남자가 아버지라는 사실을,  자신이 동침한 여자가 어머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그가 한 남자를 죽이고 한 여자와 동침했다는 건 여전히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가 죽인 남자가 아버지가 아니라고 해서, 그가 동침한 여자가 어머니가 아니라고 해서, 그의 죄가 먼지 한 톨만큼이라도 더 가벼워진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가 테베에서 쫓겨난 것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다. 그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는 희생양이 되었다. 이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죄인이 아니라는 뜻 또한 아니다. 그 두 사실에 인과관계가 없다고 해서 각각의 사실마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오이디푸스는 길을 가던 중에 한 노인과 시비가 붙어 그를 죽였다. 노인 역시 예의 바른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오이디푸스를 모욕하며 함부로 채찍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시비에 불과했는데도  격노한 오이디푸스는 그만 그 자리에서 노인을 때려죽여버렸다. 이것을 단지 무지함 때문에, 혹은 일종의 운명적인 함정에 빠져 불가항력적으로 저지른 근친살해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근친살해'에서 중요한 것은 '근친'이 아니라 '살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오이디푸스는 별 이유도 없이 화풀이 삼아 한 노인을 때려죽였다. 알고 보니 그 노인이 그의 아버지였다는 건 여기서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은 또 어떤가. 과연 오이디푸스가 테베의 여왕인 이오카스테를 사랑해서 결혼했을까?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인 줄은 몰랐다고 해도 그녀는 그의 어머니 뻘이었다. 물론 그녀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웠을 수 있고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는 그런 낭만적인 이야기를 완전히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오카스테가 테베의 여왕이 아니었어도 오이디푸스가 그녀와 결혼했을까? 이오카스테와의 결혼은 이방인인 오이디푸스가 테베의 왕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는 테베 사람도 아니면서 테베의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고 그리하여 자신의 어머니뻘인 여자와의 결혼까지도 감행했다. 여왕 자리가 위태로웠던 이오카스테 입장에서도 젊은 영웅과의 결혼은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해주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결혼은 정략결혼이었다. 정략결혼으로 이방인이 한 나라의 왕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것은 죄가 아니란 말인가.

     따지고 보면 오이디푸스에 대한 처벌이 그리 가혹한 건 아니다. 길에서 만난 무고한 노인을 죽인 - 심지어 그 피해자는 한 나라의 왕이었다 -  살인자 오이디푸스는 종교가 아니라 법률로도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 마땅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진정 비극적인 것은 그가 단지 희생양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죄 많은 희생양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두 눈을 뽑은 것은 신도 사람들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 연극은  매우 의도적으로 이러한 사실들을 왜곡하거나 어물쩍 넘어간다. 왜냐하면  단순하기 그지없는 흑백논리가 이 연극이 추구하고 강요하는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100% 피해자가 아니라면, 피해자가 100% 선한 자가 아니라면, 이 연극의 세계관은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 이 연극은 유아적인 선악 논리에 집착한 나머지, 그 모든 인간 세상의 본성과 모순과 부조리와 비극에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린 나머지, 윤리적 완벽주의에 경도되어 있다. 윤리적 결벽증이라는 강박에 쫓겨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착하게 살아야 해. 왜냐하면 착하게 살아야 하니까. 그럼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행복해질 거야. 래서 이 연극은 오직 그 세계관만을 지켜내기 위해 2시간 내내 허덕인다. 물론 세상을 흑백으로 가르면 사는 게 참 편하다. 남들에게 떵떵거리며 큰소리치기도 편하다. 보란 듯이 착한 사람이 되는 것도 편하다. 그러나 치열함도 깊이도 책임감도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자기 만족적인 선함은 사악함이다. 지옥으로 향하는 모든 이정표는 선한 의도로 쓰였다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오늘날 이방인 문제는 단순히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대결도 아니다.  감당할 수 있는 것과 감당해야 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해 일일히 논하지는 않겠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단순화시킬 수 없다는 건 안다. 심지어 독일이 저지른 홀로코스트에 조차 - 그 천인공노할 만행의 비인간성과 잔혹성 자체는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는데도 - 여러 가지 실질적인 논쟁이 가능하다. 예전에도 홀로코스트는 있었다. 그런데 현대에 벌어진  홀로코스트에는 어떤 쟁점들이 있는가. 과연 자신만의 종교, 자신만의 민족, 자신만의 법률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인가. 유태인들과 함께, 이방인들과 함께, 이민자들과 함께 똑같이 한 표씩을 부여받는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인가. 공동체 구성원 간에 진정성과 정체성에 대한 신뢰 없이 과연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과 감당해야 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 연극 안에 나오는, 털이 찰랑찰랑 빗질이 되어 있는 해맑은 표정의 레트리버야 말로 이 연극 자신의 초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몇몇  사람들의 사례를 들이밀며 순진한 얼굴을 한 채 데데한 휴머니즘으로 눙쳐버릴 문제가 아니다. 착하게 살아야 해. 왜냐하면 착하게 살아야 하니까. 그럼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행복해거야.  이런 얘기라면 나는 더 큰소리로 더 오래 떠들어 댈 자신이 있다. 단지 하지 않을 뿐이다.

     이 연극은 철학적이지도, 문학적이지도, 감동적이지도, 심지어 - 놀랍게도 - 감상적이지도 않다. 자기 자신은 결코 의도하지 않았으며 자기 자신 안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결과적인 비겁함과 가증과 안일함이 가득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마나한 얘기라는 것이다. 하나마나한 얘기를 하고 있으니 오히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다. 분명히 말하건대, 좋은 연극은 의도가 선한 연극이 아니다. 사람들을 교화하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다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면, 어쨌거나 그런 선하고 좋은 의도로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차라리 종교에 귀의하던지 시민단체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이것은 -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 선한 의도를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선한 의도가 선한 의도 자체로 제대로 평가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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